한경면 낙천리 아홉굿 의자마을
올레길 제13코스 의자공원에서
잣질로 접어드는 곳
그리 넓지 않은 밭 전체에
조금은 드물게 선 종자들이 자라
이렇게 고귀한 빛의 참깨꽃이 피었다.
어찌 보면 여려 보이고
어찌 보면 고귀한 빛이
점점 희어지면
꽃가루를 다 받았는지
뚝 떨어지고, 그 자리에
고소한 알맹이를 품은
참깨 열매가 달린다.
♧ 참깨꽃 - 임영봉
山넘어간 누이야 깨꽃이 핀다
시집 못 가고 죽은 것을
들꽃보다 더 서럽고 가난한
깨꽃이 핀다.
이랑이랑 참참히는 씨앗을 넣으며
꽃을 볼 수는 있을라나
정말은 볼 수 있을라나
눈물 눌러 함께 심는 것을
나는 먼발치에서 보았다.
그러나 꽃은 끝끝내 피었고
이마를 두드리며 바라보라고 바라보라고
꽃대를 툭툭 두드려
꽃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살분홍 입술 사이로 반쯤 웃어보이던 누이여
깨꽃을 바라보면 면사공장
누이의 검정 치마폭에서
가지런히는 숨막히는 손가락들이
저승으로만 뻗어내리더니
깨죽 한 사발 수저 떨구고
예배당 종소리 따라가더니
깨꽃은 더는 차라리 지더라
♧ 참깨 밭에서 2 - 채홍조
참깨가 싱싱 푸르다
무덥고 긴 장마 이겨내고
잎새마다 하얀 초롱불 밝혀 달고
사각기둥 곧추세워 찬찬히 초록벽돌
하늘 향해 쌓아 올린다
벌들이 잉잉거리며
초롱에 머리 처박고
노란 꽃 지단 뒷다리에 매달고
꿀 한 모금 얻으려고 들락거린다
짧은 생애 그 작은
한 알을 깨치고 나와
무장무장 한 그루의 나무로 청청하구나
노르스름하게 익어 가는 열매
대궁 잘라 허리 잘근 동여매
서로 머리 맞대고 밭고랑에 세워두면
제비새끼처럼 입 딱 벌리고
하얀 참깨들이 옹알옹알
옹알이하며 나란히 누워있다
거꾸로 들고 툭툭 치면
오소소 싸락눈처럼 떨어지는
하얀 깨알
내가 흘린 땀방울처럼 사랑스럽다
♧ 참깨밭을 지나며 - 배교윤
애물스런 자식의
영혼 한 자락씩을 염주에 꿰고
산이 산을 잡고 선
장산(長山) 보리암으로
한산모시 치마저고리
은비녀로 쪽진 머리
하얀 버선, 옥빛 고무신 신고
구슬 가방에 손수건 한장
칠월 백중날이면
하얀 참깨꽃을 보며
긴 신작로를 따라
절에 가시던 어머니
곱던 시절
그 모습 생각 하고 있는데
어느 청산으로 마실 갔다 오는
흰 나비 한 마리
♧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 김인육
아버지가 꼭 너만 했을 때였구나
연보라 참깨꽃이 초롱을 켜던 여름이었다
열한 살 어린 아버지의 손을 놓지 못한 채
할아버진 떠나가셨단다
생전엔 힘이 장사셨지
용돌이네 대건이네 할 것 없이
고향 동네 대들보란 대들보는 모두
할아버지의 어깨를 탄 것이란다
아무렴, 자식 사랑도 장사셨지
장날 해거름이면
막걸리에 취한 육자배기 가락을 좇아
눈오는 날 강아지새끼처럼 마중을 나가면
할아버진 어김없이 눈깔사탕에 무동을 태워주셨단다
그날 밤은 깊도록 달디단 눈깔사탕을 녹이며
반딧불이 호박꽃초롱을 켜고 동화처럼 잠이 들었지
그렇게 행복했단다
맘씨 좋으신 너희 할아버지가
도회지서 이사온 심주사의 보증을 앉기 전까지는 말이다
화병이 나셨던 게지 그렇게 술병도 나셨을 게다
3년이 넘게 빚보증에 시달리어 희나리같이 여위시더니
연자초롱 참깨꽃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메케한 모깃불 연기가 봉화처럼 피어올라
온 동네 사람들까지 눈물 뿌리게 하던 날이 있었단다
아들아
오늘은 힘 장사 네 할아버지 26주기 기일이다
먼저 촛불과 향을 피우고 술을 세 번 나누어 붓고
절을 두 번 해야지
머리 조아려 발원도 해야지
세월의 강을 따라
네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떠나야 하듯
세월의 강을 되돌아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네가 되는
신비한 마법을 익혀보자꾸나
뿌리를 더듬어보자꾸나.
♧ 바람 혹은 절망에 대하여 - 가영심
절망의 끝에 마주서면 무엇이 보입니까.
벽이 아니라 달려도 달려도
끝없는 벌판
그 가슴 한귀퉁이라도 죄끔 보입니까.
어떤 땐 불꽃 심장에 꽃을 피워서
끝나 가는 11月의 마른 철조망에다
시뻘건 코피쯤을 덕지덕지 발라 녹슬게 하더니
가시 엉겅퀴 넝쿨처럼 뻗어나는
바람의 그 알 수 없는 침묵에다
사랑이라는 기다림 하나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바람은 영혼의 노래입니까.
살아도 살아도 목숨 다할 때까지
곁에서 떠나지 않는 절망에 대하여
불면의 밤이면 대문 밖으로 나가
소금 한 웅큼씩 후이 뿌립니다.
잠든 꽃들 사이로 달빛 눈부시게 걸어다니고
잃어가는 하늘의 별과
지상의 아름다운 모든 순수의 것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들 가난한 마음을
하얗게 참깨꽃 시름없이 말라가는
단식하던 날들의 기나긴 목마름을 위하여
던지는 나의 물음은
바람은 절망입니까, 아니면 다할 수 없는 기도입니까.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마 속 참나리 (0) | 2014.07.19 |
---|---|
무궁화는 피었는데 (0) | 2014.07.18 |
우리 할망넨 영 살았수다 (0) | 2014.07.11 |
장마 속의 능소화 (0) | 2014.07.07 |
산에 스치는 바람 2(소상호) (0) | 2014.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