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머체 숲길에서 만난 덜꿩나무
계절을 일깨우는 듯
빨간 열매 달고 있다.
김연미 시조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의
시조 몇 편 골라 같이 싣는다.
♧ 아침 여섯 시
밤새 드리웠던 기다림이 흔들렸다
스물두 살 처녀의 젖봉오리 저 오름
꿈처럼 커튼 사이로 실루엣을 그리고
첫 경험이 붉은 건 수줍음 때문일까
천천히 얼굴 드는 이마가 눈이 부셔
새들은 하루를 물고 서쪽으로 떠난다
♧ 가뭄
하늘도 기어이 화를 내는 것일까
사대강 물줄기 권력 안에 갇히고
도막난 울음소리도 그쳐버린 이 땅에서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다. 모질게 다문 입술
바득바득 돌아서서 바닥까지 내려가면
시커먼 치부들까지 부끄럼 없이 드러나고
한 방울 단비 같았던 양심들도 말라버린
낯 뜨거운 이 여름을 또박또박 증언하라
거북등 갑골문자가 현대사를 다시 쓴다.
♧ 산의 침묵
하늘도 나무도 길도 말끝을 흐리는 오후
순백의 표정을 띤 눈발도 굵어지면
정체된 도로의 맥박
붉은 신호를 보낸다
절대로 꺾이지 마라 깜빡깜빡 깜빡깜빡
뒤틀린 언어에 묻혀 색깔을 놓치고도
저 홀로 당당하거라
오래된 나무들아
길조차 표정을 지운 일자형의 세상에서
이 겨울 산의 침묵 내안에서 깊어지고
진실의 중심을 찾는
전조등이 바쁘다.
♧ 봄 봄
장편소설 줄거리 잡고
겨우내 고심하던
벚나무 가지가지
에피소드 피어난다.
하얗게
명작 한 편이
완성되는
이 봄날.
♧ 벽을 깨는 봄
봄이 쓰는 에세이
초고를 잡을 무렵
콘크리트 벽을 타는 실금 하나 보인다
금이 간
시간을 따라
슬픔들도 고이고
건조체 외길 따라 얼음살도 박혔을
깍지 낀 고집들이
만연체로 풀어질 때
내 안의
작은 길 하나
벽을 깨고 있었다.
♧ 노을 2
네로의 즉흥시마다
아우성이 검붉다
삭제된 소리 너머
불에 타는 저 도시
또다시
눈을 감는다
페이드아웃(fade-out)
암전(暗轉)
♧ 겨울비
화살을 맞고 나서야
과녁인 줄 알았어요
오래된 연못 위로
빗방울 떨어진다
양심의
정곡을 찌르는
저 차가운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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