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박주가리와 강연옥의 시

김창집 2014. 12. 15. 09:46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다 익은 박주가리 열매가

제 몸을 열고

씨앗을 날려 보낸다.

 

분신과 같은 씨앗들이

볕바르고 기름진 땅으로 멀리멀리 날아가

뿌리를 내리고

천년만년 자손을 번성하며 살라고

기원하듯 가슴을 연다.

 

하필이면 추운 날씨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을 골라

바람으로 바람의 벽을 두드린다.

 

오랜만에 손에 잡힌 시집

강연옥의 시집 ‘물마디꽃’에서

시 몇 편을 골라 함께

박주가리 씨앗을 날린다.

   

 

♧ 산지천 2

 

 산지천에 발 담그고서야 알았네

 살갗 위 알싸한 통증

 팽팽히 당겨지는 정신 따라 한라산 얼음꽃이 먼 시간을 돌아 몸에 소름 돋네

 몸에서 물냄새가 나네

 흘러가지 못한 것들에겐 물때가 끼듯 기억의 후각

 남수각 동문시장 사람들의 눈물을 받아내며 흐르거나 그 옛날 산지천 거리여자들이 밥그릇으로 눕던 여인숙 물비린내거나

 한바탕 물에 엉켜 세월을 범할수록 가슴팍에 조각된 상처

 이상하지, 세상을 씻으며 산다 해도 몸의 어느 곳엔 내밀하게 물때가 끼고

 기억의 끝은 열려있어 내 몸에도 흐르는 산지천

 한라산 까마귀 마른 소리를 적시고 돌아와

 목울대를 적시는

 

 

♧ 못질을 하며

 

  벽이 힘주어 밀어낼 수 없듯, 못이 벽에 한 몸으로 박힌 것은 못이나 벽이나 어찌할 수 없는 일, 망치의 울림이 못 뿌리에 다다를 때 합장을 하듯, 벽의 속살이 못 끝을 꽉 문다

 

  세상의 낯선 길이 처음으로 열릴 때 두렵지 않은 것들이 있으랴. 지난날 벽은 귀와 눈과 가슴을 닫은, 박제되었던 영혼이 허물어지듯 떨림에 웅크렸던 품이 조금씩 열린다

 

  가슴이 무너진다는 것은 아프지만 공명할 수 있다는 것, 못의 몸통을 타고 번지는 세상 아픈 울림들, 상처도 묵으면 그 자리에 뚝심도 생겨나, 못은 무엇이든 척척 받아드는 벽걸이가 되어가네

   

 

♧ 가파도 청보리

 

저 멀리 책장을 넘기는 물결 읽고 읽어도,

수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소리 듣고 들어도

지금껏 가슴에 담지 못하네

 

각질을 벗기는 파도만으로 그 속을 알려 했으니,

온몸으로 물질하는 섬

 

가파도에서 물결은 섬의 가운데서도 일어, 청보리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로 바람이 쓸어갈 때

가슴팍에 파란 물결이 인다

매어둔 삶이 해초처럼 풀어지며

바람 소리에 묻히고 바다 속에 묻히네

무덤 속도 이리 부드럽다면?

 

청보리 속에 뼈물결 일어

생의 지느러미 신명나게 흔들어보아도 좋을 듯

살이 녹아 흐르고 생각의 결들이 가슴에 출렁이는데

   

 

♧ 겨울 바다에선

 

저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은 누가 데려갈 것인가

 

사소한 일이라도 원인을 따져보는 것은

내게는 꽃씨를 심는 일이다

무엇이 무엇인가의 손에 이끌렸으므로

꽃이 피는 것이며

또 무엇인가의 손에 이끌려 꽃이 지는 것이라고

 

바다 위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바다에 내미는 수많은 손들이다

눈송이들은 무엇을 데리고 와서 무엇을 데리고 갈까

 

저 꿈쩍 않는 섬은 아닌 듯싶은데

바다는 입술을 열어 눈을 받아먹고

섬 테두리에 파도가 꽃을 피우고

섬 테두리에 바다 목소리가 더 큰 걸 보면

무엇인가가 섬에 손을 내미는 이유가 되었다

 

사는 것이 온통 감옥이라지만

알고 보면 저가 저를 가둔 감옥만 할까

겨울바다에선 가슴속 멍울 박힌 섬에도 물결이

들락날락 손 내민다

고독을 건져내는 손! 눈물을 닦는 손!

섬으로 사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음은

겨울바다에선 움직이지 않는 손이 하나도 없으므로

   

 

♧ 서로의 가슴이 되기까지

 

실내 화단에 놓인 현무암 돌멩이

어째 환하다 싶어 보니 풍란이 흙도 없이 꽃피웠다

언제였던가

뿌리와 돌멩이가 서로 꽉 잡은 날

처음 들여와 돌멩이에 얹혔을 때

어디 염치없이 덜썩 주저앉았겠는가

그 자리 낯설어 며칠이고 잠 설치는 경계 있었을 터

오래도록 미안하지 않을 만큼

힘들지 않을 만큼 돌멩이를 가볍게 누르며

숨결을 가다듬었으리라

어디 돌멩이라고 선뜻 끌어만 당겼겠는가

헛손질 헛발질에 수없이 앓기도 하며

송송 구멍마다 물기를 잠그며 자리를 열었으니

서로 깊게 단단하게 안은 몸

이제 세상 바닥, 더 두려울 것이 없는가?

   

 

♧ 여닫이문

 

사람들은 아는지

삐걱거려 오히려 외롭지 않다는 걸

 

문고리로 손가락 걸던 젊은 시절

자신이 성역을 지키는 일이라며 서로 이마를 맞대며 틈이 없었다

햇살에 빗살에 살갗이 갈라지고

스며드는 달빛에 가슴이 휘어지기도 하며

문틈으로 들고나는 바람은 굵어져만 갔다

 

찌들고 거친 때의 두께로도 채울 수 없는 틈새가

서로 숨구멍을 열어주는 유연함이 아니냐고

서로 운명을 잡아주는 동아줄의 울림 같은

삐걱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참으로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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