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눈밭에 다녀와서

김창집 2014. 12. 8. 00:16

 

 

12월에 들어서서 6일 동안

매일 비바람이 치고

한라산엔 눈보라 날려

어둑한 산천을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오늘은 날씨가 조금 좋아져서

결국 다가갔다.

 

개오리오름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와서

이미 있던 길을 다 지워버리는 바람에

눈길을 헤쳐 나가는데

애를 먹었다.

 

모처럼 걸어본 눈길

힘들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 저 눈밭에 그리움을 묻고 - (宵火)고은영

 

어제의 꽃은 시들고

밤이면 불빛 따라 흐르지 못하는 어둠을 끌어안고

불구의 영혼으로 부르던 묵언의 외침들

패색 짙은 선로에 서면 허무만 팔랑대고.........

 

삶의 한계를 절감하는 날은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갈 인생이 더욱 아프다

아무리 울어도 외로움이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고독은 면할 수 없다

 

저 눈밭에 그리움을 묻자

저 눈밭에 진저리치는 나의 상처를 묻자

저 눈밭에 어두운 나의 과거를 묻고

아픔을 묻고 나의 슬픈 눈물을 묻자

 

쉬지 않고 하루종일 내리는 눈

곁가지로 나풀대던 등 피로

영혼이 흔들리는 추위에 서서도

살아감은 욕망과 필요를 줄이며

그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 눈밭에 서서 - 이향아

 

벌판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눈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흐느낌으로 세상을 파묻는다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하얗게 되어서 서늘히 식을 것이다

불길이 꽃밭처럼 이글거리다가

그을린 삭정이 검푸른 연기까지

끝내는 흰 재로 삭아내리 듯이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햇발 아래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과

이별을 흔들던 진아사 손수건

항복을 알리는 창백한 깃발과

핏기 없이 죽어가는 마지막 얼굴

눈은 자꾸만 오고

세상은 자꾸만 파묻히고 있다

 

지금은 찬연하여도

희게 희게 바래서 몰라보게 되면

비로소 끝이라는 걸 믿어도 될까

눈 덮힌 벌판을 바라보면

이미 심판이 끝난 것들이

눈발되어 차분히 내린다는 것을

황홀한 꿈에 잠긴 영혼들의 세상을

아주 가까이서 엿볼 수가 있다

 

 

♧ 슬픔은 하얀 눈밭 - 권경업

 

동짓달 그믐밤 어둠으로도

이 슬픈 가슴을 덮을 수 없다면

백두대간 위로 스러지는 잔별을 보며

새날을 기다리자

그래도 슬픔을 가눌 수 없다면

내 지나간 능선과

너 남겨놓은 계곡을

섬섬이 담아 지고

눈 덮히는 백두대간으로 가자

투명한 月鏡월경* 안주 삼아

뿌려둔 추억을 취하도록 마시자면

슬픔은

하얀 눈밭 되어

백두대간에서 빛나리

 

---

*月鏡: 강원도 지방의 소주인 경월을 산사람들이 부르는 애칭.

   

 

♧ 싸늘한 눈밭 사슴처럼 걸어와서 - 서지월

 

한번 들어보게나

바람이 불 때 말이지

나무의 나뭇가지들이 즐거운 비명 지르면서

놓아버린 새를 그리워할 때

봄은 오고

새잎 피워낸다는 사실을

거기 새론 음악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들 뜨거운 피 데워지고

다시 잔을 들면 피어나는 꽃송이들 탐스럽지 않겠는가

햇빛 나고 달빛 나고 별빛 더해주지만

더러는 먹장구름 몰려 와 비 퍼부면서

너 가만 있거라 너 가만 있거라

물고문 은총 내리지만

그게 어디 사는 재미인가

진실로 우리가 우리 마음의

담도 뭉게고 감시와 철조망을 철거할 때

한껏 푸른 종소리 울려오겠지만

이웃간의 담이 높아질 때

찾아드는 겨울은 살벌하고

이처럼 우리가

싸늘한 눈밭 사슴처럼 걸어와서 시린발도

시리지 않게 포근한 금잔디 노란 민들레의

어머니같은 그리움 갖자는 것이야

더러는 개개인 이익을 위해

외투 꺼내입고 혼자 포근한 척 하지만

생명이, 세상에 버려진 몸뚱아리가

가고 없으면 남는 것은

빈 집 뿐일세

콩깍지같이 단단한 쓸데없는 과욕일랑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 옷 벗으면 너 옷 벗듯

마음의 화장을 걷고 흥분하지 말고

천국을 향한 하나씩의 계단

아름답게 밟고 가는 잠깬 목동의

피리소리를 듣자는 것이야

 

 

♧ 저 눈밭에 그리움이 - 최홍윤

 

경인년 벽두에 내린 폭설로

호랑이 등같이 얼룩얼룩해진

백두대간 저 멀리 설평선 위로

내 그리움이 보이네

 

넓은 들판

아흔아홉 구비 아래 강릉 땅

작뜩 작아진 눈밭에 사슴이,

토담 길에 눈치는 아버지가,

토끼 굴 뚫던 할머님이 눈에 아롱지네

 

토담에 노송도 작아 보이고

대궐 같은 고가들도 납작해져

은색으로 물들인 폭설은

온통 작디작은 세상을 만들어 버렸네

 

해 질 녘에

북서풍은 칼날보다 날카로운 이빨로

눈가루를 휘 몰아가고

언 햇덩이만 검푸른 하늘에 떠가는데

 

지구 높이를 돋운 백설로

납작해진 세상

덩달아 내 가슴도 작아지지만

동해 바다에는 그리웠던 얼굴들이

달덩이로 떠오르고 있네!

   

 

♧ 하얀 눈밭에 - 하영순

 

시골길

하얗게 쌓인 눈밭에

강아지처럼 뒹굴고 싶어

 

자동차를 세워놓고

마음은 뒹굴고

나는 걸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옥양목 갚은 눈밭

 

뽀드득 뽀드득

들리는 소리

눈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한참을 걷다

돌아오면서 그 말뜻을 알았다

 

이 형광등

네 발자국을 보라는 말이었구나.

눈밭에

그대로 흘려 놓은 내 마음

 

살며시 지켜보는 저 햇살

에구

부끄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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