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리 방송 촬영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저지리 출신 김세홍의 첫 시집
‘소설 무렵’이 와 있다.
그 동안 발표되었던 것들과
새 작품을 모아
4부로 나누어 엮고
소설가 정찬일의 발문을 덧붙였다.
시 몇 편을 뽑아
요즘 한창 제주섬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호프스와 함께 싣는다.
□ 시인의 말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편이다.
어디 물건뿐이랴.
어제의 각오까지 그럴 때가 있다.
그것들은 대개,
우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시감을 느끼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때가 많다.
슬렁슬렁 그것들을 게으르게 떼어내다 보니
어느새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돼버렸다.
벗들이 돌아간 해 저문 바닷가에
나 이제야 詩망사리를 들고 일어선다.
아버지 무덤가에 첫 시집을 놓는다.
2014년 초겨울
김세홍
♧ 소설(小雪) 무렵
한세상 저물녘
당신의 떠 먹여주는 숟가락에
온기 한 점을 받아먹은 일이 있다
나 먼저 캄캄한 터널을 지날 적에
한 점 눈물로 배웅해 준 이 있다
다시 한 시절이 저물어
솜이불 넣는 기척 있어 돌아보매
숟가락으로 누운 적막강산
누굴 떠먹이려 쌀알이 소복소복
♧ 노루와 허수아비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수삼일 눈이 퍼부어 내렸다
브로컬리 밭에 허수아비도 궁금했을까
언 땅에 온기를 찍어 내리던
찔레덤불 무성한
소롯길의 소심한 발모가지를,
쓰러지도록 애간장을 졸이는 것은
어깨에 내려선 눈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
그것 때문이었을까
오밤중에 위태위태 걷던 길 따라
개풀알풀, 광대나물, 쇠별꽃 순이 오르는
눈 먼저 녹기 시작하던 거기,
한 번 더 산길을 지워버린
간밤 눈보라에
허수아비가 쓰러지도록
궁금한 것은
초록 푸성귀를 한가득 담고 간
물기 서린 눈망울의 안부겠지
♧ 그늘
동백꽃 져버린 가지가
동백꽃 진 자리에 그늘을 만든다
바람이 맥을 놓아버린 순간
분별 잃어버린 힘을
거름 삼아
꽃망울을 틔워 왔다
피고 지는 일이
분별없는 일이라 여겼다
한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다
지나와서 보니
나를 드리우던 눈그늘이 있다
♧ 매화차에 손 끝은 붉고
푸슴,
눈발이 날리는 창 앞에
흐드러진 능수매화 촉이 붉고
간밤에 찾아온 벗을 맞아
젊지 않은 벗이
옹알이하려는 것들을 몇 줌씩 놓아
찻잔 속에 끓는 물을 붓는다
자전의 소용돌이 따라
양지의 날 수를 다 셈하는 봉오리가
천천히 코끝에서 만개하고 있다
식은 햇볕에 흐느적이는 연분홍
이 참살이 애틋하다
우린 좀 더 늙어도 되겠지
수 분의 침묵으로 세상일에 달관한 척,
말하고 싶은 것을 견뎌낸
목구멍에서 망울진 고백으로
둘 사이에서 피고 지는 시간이 총명하다
어떤 글썽임은
보름달을 짜부라지게도 하고
어떤 흐릿한 눈은 반달을
만월로 만드는 마술을 펼쳐 보인다
나에게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은
늘 잘 닦인 것만은 아니여서
어떤 날은 흐리게 봐야
붉게 물든 손끝이 보일 때가 있다
♧ 햇살의 관(棺)
병원 갔다가 치료를 끝내고 나온 뒷골목
햇살에 겨워 들어선 동네 놀이터
느티나무 품이 그늘을 만드는 자리
저것도 내 만큼 살았을까
낙서 가득한 돌 벤치에 드러눕는다
깜박깜박 얕은 졸음이 더 깊은 졸음을 불러오고
나뭇가지 수만 다발의 햇살이 나를 인화할 때
눈 반쯤 떠 보면 정수리로 부시게 내려오는 손이 있다
지나온 삶, 은총처럼 쓰다듬어 준 손길
오랜만에 대하는가, 어쩌면
이 세상이 없었던 일 같기도 하고
마흔다섯 나이테 칸칸마다
옹이를 다독이며 오는 어진 말씀
이마를 어루만졌다가 뺨을 쓸어 내려오고
한식경 그늘을 옮겨가며 염殮을 하는 손길
등을 대고 누운 벤치의 낙서들이
건방지게 너나들이 하는 동안
햇살이 사내의 근심 속 관을 지어 먼 곳으로 밀고 간다
깜박깜박 반쯤 뜨다만 눈에 들키는
허공에 뜬 익명의 쪽방들
♧ 수국水菊에게
우리 어딘가에서 만나지 않았을까
흙바람 일어가는 유월의 길섶
무슨 기시감으로 발길을 멈추고
나는 그대를 알은체 하는 것인가
옅은 바람 속 홍조 띤 숨결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 삶이 끊기지 않는 어느 매듭에서
되풀이 되어 온 기연이 사뭇 수고롭지가 않아
그대 또한 이편 생에서
빈곤하게 떠돌던 날 불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늘과 맞닿은 인연의 갈피
송이송이 숨결로 다리를 놓아오는
저 길 모퉁이 윤회하는 한 굽이 세상
나를 업어오는 유장한 들숨이 있어
눈멀어 바로 볼 수 없는 그대여
돌아누운 꿈자리엔 어지러운 바람이 불고
향유할 수 없는 마음만 번잡하여라
쪽잠 같은 세월이 분망한 뒤에
언젠가 그대가 있던 길 한번 흔들려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햇살 속으로 쓸려가
그대 업이 가벼워지고 가벼워져 세상 흔적 없을 때
비로소 내 고단함도 멈추지 않을까
우리 어느 길섶에서 다시 만나
무슨 우연으로 이곳을 지나더라도
한동안 내 눈동자에 살아온 그대
희미한 기시감에 미열을 느끼게 되면
그대에게 업혀오는 평안한 날숨을 듣게 되겠지
이 세상 내게로 향해 오는 모든 걸음걸음이
첫 발자국인 그대를 바로 보게 되는 날
내 마음 한자락 꽃 피울 수 있으려나
내 눈길을 찾아온 오롯한 그대
긴 숨결을 받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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