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양순진 시집 '자작나무 카페'

김창집 2015. 2. 22. 23:01

 

♧ 애월 달빛 외 2편 - 양순진

 

  외도를 지나 하귀 포구를 지나 고내를 지나면 닿는 곳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애월, 달빛이 비추면 누구나 머물러 달라는 소리로 통역된다. 달빛이 비추는 부분에서 달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들어가기 위해선 몸을 구부려 애월 포구를 한 바퀴 휘이- 감싸 안아야 한다. 달빛 깨우는 바다의 귀울음 되어 보아야 한다.

 

  애월은 물에 발 적시는 곳이 아니다.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는 곳도 얕은 절벽에 몸 기대는 곳도 아니다. 달빛에 물 적시고 달빛에 귀 기울이고 달빛에 몸 씻는 달빛전차의 간이역이다. 애월에 접어들면 제주의 바다가 다 모여든다. 제주의 파도가 다 모여들고 제주의 갈매기가 다 모여든다. 달빛에 스며들어 멎었던 그리움이 다 모여든다. 삭아버린 슬픔의 비릿한 내음까지 달빛과 몸 섞는다.

 

  애월에 무언가 놓고 간 기억에 발을 들여놓는다. 정확하진 않지만 가물가물 달꽃이 피어오르는 간이역에서 언젠가 꼭 한 번 스쳐간 새하얀 파도, 그 파도의 지워진 문장을 다시 읽기 위하여 붉은 귀를 달 아래 세워둔다.

 

  한림항을 지나 고산포구를 지나 모슬포항에 머물다 다시 돌아올 때도 닿는 곳이 있다. 애월, 아무도 머물지 않는 곳, 가고 싶어도 더는 갈 수 없는 당신의 마음처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슬픈 달그림자 에워싼 곳, 달의 뒤쪽은 항상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려고 파도를 불러 세우지만 몸을 비트는 사이 파도는 천 번 울어야한다는 것을 거기 두고 온 귀는 기억한다.

 

  달빛에 온통 젖은 소라 귀는,

   

 

♧ 나이테의 보폭으로 - 양순진

 

  일 세기 전의 바람이 일 세기 후의 나무를 쓰러뜨린다면 뿌리가 박고 있던 흙의 내부엔 바람의 후예가 혼을 불어넣어 유목 중이었던 건 분명한 이론

 

  너무나 아득하여 먼 하늘가 숨어버린 연민의 사람도 옷장의 내부를 들춰보면 애벌레 흔적들 스멀거리듯 몇 천 년 흐르면 하늘 찾은 나비처럼 눈동자 안으로 비행할 일

 

  이 집과 건너편의 집 멜로디는 너무나 달라 한 족속이 될 수 없는 음音은

일 세기 전의 바람에 접목된 나무처럼 누적된 슬픔의 기억으로 겨울을 버틴다지 거짓말 못하는 나이테의 보폭으로 숨결은 멎을 듯 멎을 듯 이어지고 죽어가는 잎사귀의 빛깔로도

 

  이젠 아네

  아카시아잎의 어긋남처럼 별이 심장에 박히는 슬픔을

 

  수억 년 전의 바람이 수억 년 후의 하늘을 휘감는다면 하늘에 위배된 구름 한 점이 토해낸 빗줄기는 몇 개의 산을 허물어뜨릴지

 

  이젠 아네

  연민의 뒤에서 껴안지 못해

  나무의 잎사귀 무수히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 자작나무 카페

 

한참 오래 전

정실길 걷다가 긴 나무 기둥 심어진

집한 채 보았네

안은 볼 수 없었지만 나무줄기에 잎이 돋고

자작나무 카페라는 간판 올려졌을 때

또 한 번 스쳐 지나갔네

그대와 함께였네

그대와 나 아직 서먹서먹해서

그 문 열고 들어가지 못했네

카페 문 여는 것보다 그대 맘 여는 게

먼저였기에 마음 깊이 숨겨두었네

그대 안 궁금한 것처럼

카페 안 궁금했지만

다음 生에 라고 약속했네

가을 가고 겨울이 올 즈음에 그가 떠났네

그의 마음 열어보기도 전에

카페 안 들어서지도 못한 채

자작나무 사랑은

설원에 묻혀버렸네

다시, 정실길 걷게 되었네

봄꽃들 피어나 서성였지만 난 혼자였네

자작나무 잎은 무성할 대로 무성하고

카페 문 밖 빈 의자들 날 보고 있었네

안은 커튼에 가려져 볼 수 없었네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스쳐지나갔네

그대 안 들어서도 못한 채 보내버린

그 한 生 못내 아쉬운 것처럼

자작나무 카페를 지나치네

혼자 그 앞을 스치네

그가 자작나무로 서 있네

아직도 그대 안 열어보지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