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20여 년 동안 살았던
용담동 해변에 갔다가
이런 저녁놀을 만났다.
여름다운 여름에 이르렀다는 하지에
내 뜨거웠던 젊음을 생각한다.
비록 저 해는 마지막 빛을 내지르며 떨어질지라도
내일을 기약할 수 있기에
충전하듯 기를 한껏 받으며
귀로(歸路)에 든다.
♧ 夏至하지 - 김수우
창문을 열고 집어낸다
무릎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만큼 덜어지는
나의 죄
바늘강 같은 매미울음 속으로
떠가는구나
시름없이 육체를 벗어나는
내 혼의 실오라기
어제의 바람이
어제의 하늘이
하지감자알로 굵었는데.
♧ 하지 - 임동윤
어머니 눈물져 떠나온 고향집에선
이 여름도
봉숭아가 주머니를 부풀립니다.
간장 항아리 놓였던 자리에
잡초 무성한 마당귀 우물가에
화르르, 화르르
석류처럼 꼬투리를 터뜨립니다.
인적 끊긴 집 둘레로
고추잠자리만 비행할 뿐,
먼지 낀 헛간에는 녹스는 농기구들.
허물어진 돌담을 끼고
해바라기만 줄지어 서 있고
그 무표정한 그늘을 딛고
토실토실 물이 오른 봉숭아 몇 그루,
듬성듬성 버짐이 핀 기와집 처마 밑에
해마다 둥지 트는 제비와 놀며
흰색 분홍색으로
여름을 부지런히 피워올립니다.
그런 날,
어머님 손톱에도
문득 바알간 꽃물이 돕니다.
♧ 하지夏至 - 오정방
밤이라고 하기엔 밖이 너무 밝고
낮이라고 하기엔
저녁 시간이 꽤나 깊어있다
백야白夜같은 하지夏至
낮이 가장 길다함은
밤이 가장 짧다는 말
하루의 주어진 같은 시간
시계는 멈추지 않고 제 갈길을 가건만
태양은 저 혼자 밤을 즐기려는듯
가던 길을 멈추고
태연히 지구촌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홀로 따갑게 미소 짓는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밤은 짧고 짧은데…
♧ 하지(夏至) - 최원정
장맛비 잠시 멈춘
하늘 사이로
자귀나무 붉은
꽃등을 켰다
주먹만 한 하지감자
뽀얀 분 나게 찌고
아껴 두었던 묵은지
꺼내는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매미의 첫 울음소리
놋요강도 깨질듯 쟁쟁하다
♧ 夏至하지 - 이지엽
-가벼워짐에 대하여 3
산허리 깎아지른 돌 틈에
패랭이꽃 붉은 울음 몇개
거기에 매미 소리가 악착가게
늘어붙어 한여름 짱짱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내 한날의 사랑도 저리 짜글짜글했던가 싶습니다
혹시 남실대다가 부러질라
가여운 어린 새끼 저 꽃대 부러질라…
여름 한낮 찢어지고 있던 햇빛이
마침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구름 한 장 불러와
슬며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 인동초에 꽃이 피던 날 - 박우복
쭈욱 늘어진 하지(夏至)의 햇살 받으며
모내기 하는 엄마를 찾아
어린 동생 등에 업고
젖먹이 길을 나설 때
보채는 동생의 울음 따라
등줄기로 흘러 내리는
땀방울에 젖어
산모퉁이 외딴 집
돌담 그늘에서 식힐 때
짙은 꽃향기는 빈 가슴을 채우는데
금꽃은 따서 동생 입 속에 넣어주고
은꽃은 따서 내 입에 넣고
허기진 세월을 메꾸는 시간
두 눈에서 뚝 뚝 떨어지던
금빛 향기
은빛 향기
지금도 인동초가 꽃을 피우면
젖내음에 찌들어 있는
어린 동생의 울음소리 따라
허기진 또 하나의 내가
유월의 하늘을 멍하게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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