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하지, 용담해변의 저녁놀

김창집 2015. 6. 23. 07:02

 

젊은 시절

20여 년 동안 살았던

용담동 해변에 갔다가

이런 저녁놀을 만났다.

 

여름다운 여름에 이르렀다는 하지에

내 뜨거웠던 젊음을 생각한다.

 

비록 저 해는 마지막 빛을 내지르며 떨어질지라도

내일을 기약할 수 있기에

충전하듯 기를 한껏 받으며

귀로(歸路)에 든다.

 

 

♧ 夏至하지 - 김수우

 

창문을 열고 집어낸다

무릎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만큼 덜어지는

나의 죄

 

바늘강 같은 매미울음 속으로

떠가는구나

시름없이 육체를 벗어나는

내 혼의 실오라기

 

어제의 바람이

어제의 하늘이

하지감자알로 굵었는데.

   

 

♧ 하지 - 임동윤

 

어머니 눈물져 떠나온 고향집에선

이 여름도

봉숭아가 주머니를 부풀립니다.

 

간장 항아리 놓였던 자리에

잡초 무성한 마당귀 우물가에

화르르, 화르르

석류처럼 꼬투리를 터뜨립니다.

인적 끊긴 집 둘레로

고추잠자리만 비행할 뿐,

먼지 낀 헛간에는 녹스는 농기구들.

허물어진 돌담을 끼고

해바라기만 줄지어 서 있고

그 무표정한 그늘을 딛고

토실토실 물이 오른 봉숭아 몇 그루,

듬성듬성 버짐이 핀 기와집 처마 밑에

해마다 둥지 트는 제비와 놀며

흰색 분홍색으로

여름을 부지런히 피워올립니다.

 

그런 날,

어머님 손톱에도

문득 바알간 꽃물이 돕니다.

 

 

♧ 하지夏至 - 오정방

 

밤이라고 하기엔 밖이 너무 밝고

낮이라고 하기엔

저녁 시간이 꽤나 깊어있다

 

백야白夜같은 하지夏至

 

낮이 가장 길다함은

밤이 가장 짧다는 말

 

하루의 주어진 같은 시간

시계는 멈추지 않고 제 갈길을 가건만

태양은 저 혼자 밤을 즐기려는듯

가던 길을 멈추고

태연히 지구촌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홀로 따갑게 미소 짓는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밤은 짧고 짧은데…

 

 

♧ 하지(夏至) - 최원정

 

장맛비 잠시 멈춘

하늘 사이로

자귀나무 붉은

꽃등을 켰다

주먹만 한 하지감자

뽀얀 분 나게 찌고

아껴 두었던 묵은지

꺼내는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매미의 첫 울음소리

놋요강도 깨질듯 쟁쟁하다

 

 

♧ 夏至하지 - 이지엽

     -가벼워짐에 대하여 3

 

산허리 깎아지른 돌 틈에

패랭이꽃 붉은 울음 몇개

 

거기에 매미 소리가 악착가게

늘어붙어 한여름 짱짱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내 한날의 사랑도 저리 짜글짜글했던가 싶습니다

 

혹시 남실대다가 부러질라

가여운 어린 새끼 저 꽃대 부러질라…

 

여름 한낮 찢어지고 있던 햇빛이

마침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구름 한 장 불러와

슬며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 인동초에 꽃이 피던 날 - 박우복

 

쭈욱 늘어진 하지(夏至)의 햇살 받으며

모내기 하는 엄마를 찾아

어린 동생 등에 업고

젖먹이 길을 나설 때

 

보채는 동생의 울음 따라

등줄기로 흘러 내리는

땀방울에 젖어

산모퉁이 외딴 집

돌담 그늘에서 식힐 때

 

짙은 꽃향기는 빈 가슴을 채우는데

금꽃은 따서 동생 입 속에 넣어주고

은꽃은 따서 내 입에 넣고

허기진 세월을 메꾸는 시간

 

두 눈에서 뚝 뚝 떨어지던

금빛 향기

은빛 향기

 

지금도 인동초가 꽃을 피우면

젖내음에 찌들어 있는

어린 동생의 울음소리 따라

허기진 또 하나의 내가

유월의 하늘을 멍하게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