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전선이 제주까지 북상하여
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어디 가고
창문 너머로 햇빛이 밝고
후텁지근한 공기만이
불쾌지수를 높인다.
이런 찰나에 손에 잡히는
김수열 시집 ‘빙의’
나만 읽고 말 수 없어
몇 편 뽑아
담쟁이 옷을 입은
시원한 소나무 그림과 같이 올린다.
♧ 나무의 시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 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 장날
술이 덜 깬 봄날
아내에게 이끌려 오일장 가서
이래 주왁 저래 주왁
2년생 홍매 두 그루 만 이천 원에 사고
깐 마늘에 잡꿀 한 통 사고
새끼 병아리 뺙뺙
새끼 강아지 낑낑
새끼 오리 이래 화르륵 저래 화르륵
닭똥집 지나 꼼장어 지나
맨 끝집 광주 식당에 들어
아내는 멸치국수 나는 순대국밥
아내가 선뜻 파전에 막걸리 한 병 받아 주길래
어제 술 위로 낮술 한 잔 내리고
집에 있었으면 방바닥에 엎드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 넘겼을 텐데
짐꾼으로 따라나서길 잘했구나
발그스레 낯빛에도 홍매가 피고
마주 낀 팔짱에도 어절씨구 꽃비가 내린다
♧ 나중에
목욕탕에 모셔 가 등 한번 밀어드려야지
가까운 보쌈집에 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술 한잔 드려야지, 나중에
직접 쌈도 싸 드려야지
나중에 걸음걸이 나아지면 구두 한 컬레 사 드려야지
오래된 잡지책 보면서
해 뜨는 일출봉 물 지는 천지연 그리시는 아버지
나중에 어머니랑 함께 도일주 시켜 드려야지
그때는 할머니 산소에도 들려야지
돌아오는 생신날 그림물감도 선물해야지
부러진 대걸레 자루로 지팡이 쓰시는 아버지
멋진 놈으로 하나 사 드려야지, 나중에
아버지도 나중에 가실 거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그리 많았는데
대걸레 지팡이에 불편한 몸 의지한 채
아버지는 그냥 먼저 가셨다
할머니 산소도 가보지 못하고
♧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지천명 코앞에 두고
가파르게 달려온 지난날 돌아본다며, 이 선생
강원도 어느 절에 템플스테이를 신청한 것인데
승복으로 갈아입으면서
담배나 MP3, 휴대폰은 절대 금지, 라는 스님 말씀에
MP3는 그렇다 치고, 담배는 양말에
휴대폰은 진동으로 하면 되겠지 싶어
스리솔짝 꼬불쳐두었던 것인데
저녁 공양 마치고
백팔배 이어 면벽참선하는데
뒤가 마려워 해우소에 엉덩이 까고 앉아
꼬불쳐둔 담배 꺼내려는 찰나
바지 주머니 휴대폰이 그만, 철푸덕
통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인데
허, 그거 참
쪼그려 앉아 담배 연기만 날리고 있는데
누구일까?
해우소 바닥까지 좇아와 저리도 간절하게 나를 부르는 이
누가싸랑을아름답따핸는가아아아아아아
누가싸랑을아름답따핸는가아아아아아아
♧ 곶자왈*에서
뿌리 드러내 쓰러진 나무를 본다.
수직의 긴장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땅덩어리에 선 마지막 직립보행들아
하늘의 눈으로 보면
태평양 어디에 있다는 그 깊은 바다도
지구 배꼽에 고인 물이다
지상 어디에 있다는 그 높은 산도
지구 이마에 난 여드름이다
곶자왈 속에 들면 너는
없는 듯 있다
있는 듯 없다
하늘의 눈으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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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덩굴 식물, 암석 등이 뒤섞여 수풀처럼 어수선하게 된 원시림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
♧ 사람이어서 미안하다
돼지독감으로 일주일 동안 바깥출입 못하고
방구석에 갇혀 있었다는 아내의 말에
동료 교사가 토를 달더란다
사람으로 태어난 거 다행인 줄 압서
쉐나 도새기라시믄 살처분허영 묻어부러실 거우다
저녁상을 물리면서 나도 거든다
당신만 살처분이라?
나도 아이들도 동네 사람들도
도매금으로 생매장 되실 테주
그해 겨울 석 달 동안
317만 마리 돼지와 15만 마리 소가
살처분되었다
사람이어서 다행이고
사람이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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