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태일의 시와 억새

김창집 2015. 9. 21. 08:02

 

엊그제 김태일 시인의 시집을 받아두고

바빠 펴보지 못했는데,

 

어제

제주어보전회 회원들과 함께

영아리오름에 갔다가 찍어온

새 억새 사진을 정리하다 문득 생각나

시집을 펴들었다.

 

<그녀를 떠나야 그녀를 보았다>

 

그의 홈페이지

‘한라의 숨비소리’엔

이미 산뜻한 사진에 곁들여

이 시집의 시가 실려 있었다.

 

오름에 같이 간 분들에게

제주어와 관련된 것들을 이야기 해주느라

도둑질하듯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시집에서 시 몇 편을 골라

새 억새와 함께 선보인다.

 

 

 

♧ 가을 엿보기

 

가을 질주하는 시계탑은

어둠 실은 막차 달리듯 덜컹덜컹

불나방 유혹하던 가로등은

공원 벤치 기웃거리며 그렁그렁

 

소슬바람 부는 빈 거리엔

애틋한 봄날의 약속 다 어디 가고

취객 술주정만 우렁우렁

밤하늘 반짝이던

순정?

열정?

추락하는 종교 따라 뉘엿뉘엿

우리 손가락 걸던 진초록 나라엔

낙엽만 전설처럼 뒤뚱뒤뚱

 

가로수 가지마다 높새바람

마지막 한 잎 털어내려 우왕좌왕

달콤한 매연에 빠진 아스팔트

단풍 옷 갈아입어 우쭐우쭐

   

 

♧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

 

새벽 두시

캄캄한 선실 차창

열사흘달 갸웃거린다

가만가만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니

바다 위에 시간이 샘솟는다

뱃전에 솟구치는 파도

쏟아지는 달빛

서로 살 섞어

달맞이꽃 피어오르듯

하얗게 솟아오르는 시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내가 피워 올리는 하늘

내 생명의 혼불

순간순간 탄생한다

내가 빚어낸다

 

 

♧ 소나기 소나타

 

오랜 가뭄 끝에 소나기가 내리는군요

아마 저 하늘 위 누군가 떠놓은 정화수가 넘쳐

아차, 둑을 무너뜨렸겠지요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귀를 모았더니

어릴 적 앵두 서리하다 엿든 소리

어미닭이 달걀을 품어 쪼는 바로 그 소리로군요

그때도 저 빗소리에 소스라쳐

하서주랑의 새싹이 깨어나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낙타가 꿈을 꾸었지요

그렇게 강물이 휘감고 산맥이 휘날려

사막의 옥수수가 꽁꽁 닫힌 창을 열어젖히고

뒤란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눈을 떴지요

나 또한 태를 열고 이렇게 태어나

해와 달의 시간을 서리했고요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이 이름 모를 들꽃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받은 덤이지요

저기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 소리와 함께

   

 

♧ 새벽 빗소리

 

생명의 소리

내 영혼 두들기는 소리

새벽잠 깨우는 빗소리

대추가 익어가는 유년의 초가을

동네방네 울려 퍼지던 어머니 다듬이질 소리

모두가 잠든 새벽

초가지붕 머리맡에 달아둔 닭장에서

어미닭이 계란 쪼는 소리

몇 천 년 구천하늘 구름 속에 숨죽여 기다리다

이 여름 신록을

피아노 건반인 양 두방망이질 해대며

삶을 재촉하는 새벽 빗소리

하얀 백지 위를 달리는 펜 소리

배고픈 영혼의 소리

생명의 소리

 

 

♧ 나를 흔든 그대, 아린

 

그래, 아린

마른 가지에 꽃을 피운 건 햇살이었지

하늘이 이 땅을 낳듯

바다를 낳듯

그렇게 세상이 우리를 낳았지

마치 바람이었지

숙명처럼

아무렴, 아린

꽃잎에 이슬 내리듯

잠자는 저 바다를 깨운 건 달빛이었지

물론 나를 흔든 건 바로

이 가슴 아린

그대, 아린

   

 

♧ 바람이 피운 꽃

 

바람이었다

나를 뒤흔든 건 바람이었다

 

시커먼 암벽 높이

치솟아 오르다

하얗게 목이 메어

스러져 내리며

파도꽃 피운 건 바람이었다

 

이 한 밤 숨 죽여

두근거리다

이 가슴 속

솟구치는 파도소리

 

이 마음 뒤흔든 건 바람이었다

그대였다

 

 

♬ Autumn Leaves - Roger Willi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