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김태일 시인의 시집을 받아두고
바빠 펴보지 못했는데,
어제
제주어보전회 회원들과 함께
영아리오름에 갔다가 찍어온
새 억새 사진을 정리하다 문득 생각나
시집을 펴들었다.
<그녀를 떠나야 그녀를 보았다>
그의 홈페이지
‘한라의 숨비소리’엔
이미 산뜻한 사진에 곁들여
이 시집의 시가 실려 있었다.
오름에 같이 간 분들에게
제주어와 관련된 것들을 이야기 해주느라
도둑질하듯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시집에서 시 몇 편을 골라
새 억새와 함께 선보인다.
♧ 가을 엿보기
가을 질주하는 시계탑은
어둠 실은 막차 달리듯 덜컹덜컹
불나방 유혹하던 가로등은
공원 벤치 기웃거리며 그렁그렁
소슬바람 부는 빈 거리엔
애틋한 봄날의 약속 다 어디 가고
취객 술주정만 우렁우렁
밤하늘 반짝이던
순정?
열정?
추락하는 종교 따라 뉘엿뉘엿
우리 손가락 걸던 진초록 나라엔
낙엽만 전설처럼 뒤뚱뒤뚱
가로수 가지마다 높새바람
마지막 한 잎 털어내려 우왕좌왕
달콤한 매연에 빠진 아스팔트
단풍 옷 갈아입어 우쭐우쭐
♧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
새벽 두시
캄캄한 선실 차창
열사흘달 갸웃거린다
가만가만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니
바다 위에 시간이 샘솟는다
뱃전에 솟구치는 파도
쏟아지는 달빛
서로 살 섞어
달맞이꽃 피어오르듯
하얗게 솟아오르는 시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내가 피워 올리는 하늘
내 생명의 혼불
순간순간 탄생한다
내가 빚어낸다
♧ 소나기 소나타
오랜 가뭄 끝에 소나기가 내리는군요
아마 저 하늘 위 누군가 떠놓은 정화수가 넘쳐
아차, 둑을 무너뜨렸겠지요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귀를 모았더니
어릴 적 앵두 서리하다 엿든 소리
어미닭이 달걀을 품어 쪼는 바로 그 소리로군요
그때도 저 빗소리에 소스라쳐
하서주랑의 새싹이 깨어나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낙타가 꿈을 꾸었지요
그렇게 강물이 휘감고 산맥이 휘날려
사막의 옥수수가 꽁꽁 닫힌 창을 열어젖히고
뒤란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눈을 떴지요
나 또한 태를 열고 이렇게 태어나
해와 달의 시간을 서리했고요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이 이름 모를 들꽃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받은 덤이지요
저기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 소리와 함께
♧ 새벽 빗소리
생명의 소리
내 영혼 두들기는 소리
새벽잠 깨우는 빗소리
대추가 익어가는 유년의 초가을
동네방네 울려 퍼지던 어머니 다듬이질 소리
모두가 잠든 새벽
초가지붕 머리맡에 달아둔 닭장에서
어미닭이 계란 쪼는 소리
몇 천 년 구천하늘 구름 속에 숨죽여 기다리다
이 여름 신록을
피아노 건반인 양 두방망이질 해대며
삶을 재촉하는 새벽 빗소리
하얀 백지 위를 달리는 펜 소리
배고픈 영혼의 소리
생명의 소리
♧ 나를 흔든 그대, 아린
그래, 아린
마른 가지에 꽃을 피운 건 햇살이었지
하늘이 이 땅을 낳듯
바다를 낳듯
그렇게 세상이 우리를 낳았지
마치 바람이었지
숙명처럼
아무렴, 아린
꽃잎에 이슬 내리듯
잠자는 저 바다를 깨운 건 달빛이었지
물론 나를 흔든 건 바로
이 가슴 아린
그대, 아린
♧ 바람이 피운 꽃
바람이었다
나를 뒤흔든 건 바람이었다
시커먼 암벽 높이
치솟아 오르다
하얗게 목이 메어
스러져 내리며
파도꽃 피운 건 바람이었다
이 한 밤 숨 죽여
두근거리다
이 가슴 속
솟구치는 파도소리
이 마음 뒤흔든 건 바람이었다
그대였다
♬ Autumn Leaves - Roger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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