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에 찾았을 때는
억새가 거의 허물어져 있었는데
올해 10월 28일에 올라가보니
아직 이 정도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하기야 억새를 보러 갔다기 보다
그 멋있는 바위를 보러 간 셈이지만
넓은 평원에 가득한 억새도
그런 대로 볼만하여 열심히 찍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쌀쌀하여
겉옷을 걸쳐야 할 시기가 되어서야
11월이 되었음을 느끼고 있다.
어느 후배가 어제 산을 오르면서
요즘 참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어느덧 10월도 가고
월동준비를 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 11월 그리움 - (宵火)고은영
계절은 바람의 계곡을 호명하고
산등성이 온통 바람의 휘모리
비탈에 억새 군락은 거센 물결로 일렁인다
헐벗은 나무 사이 자작나무 잎 몇 개 외롭다
이상(理想)은 산의 능선을 타고 바람보다
더 빠른 날개로 두 팔을 벌리고
황혼조차 아름다운 서녘 창공을 선회하고 있다
계절의 을씨년스런 침묵과 침묵, 시리다
가을 그림자 멀어지는 저만치
조용한 음표 하나 눈뜨는 순간
떠나간 사랑은 이미 그리움으로 돌아와 있었다
♧ 11월의 여울 - 임영준
절로
익는 게 아니다
절로 깨치는 게 아니다
서리를 담보한 바람에
선선히 숙어 드는 것이다
여태껏 해갈하지 못한
청춘의 하소연을 헤아리며
변방의 자투리에 박혀
시나브로 요원해지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또 한 번의 편도
이 11월
♧ 11월의 갈대꽃 - 박종영
하루 종일 게으른 11월의 짧은 해와
시간의 틈새를 겨루기하고 있었다
그대 즐거웠던 얼굴을 조금은 생각하고
쓸쓸해지려는 마음의 깊이에
작은 돌을 던져 소중한 인연을 지우기도 했다
초겨울의 길목에서는
채우지 못한 허전함으로
낙엽의 길 하나 만들어 달려가고 있었다
강물이 검은 얼굴로 변하는 석양에선
누구 하나 따뜻한 웃음으로는
배웅하지 못하는 망설이는 이별에서
푸른 기억 출렁거리며 돌아눕는
11월의 갈대꽃이
창창한 고향의 강으로 섞여가는
저토록 질긴 순종의 의미를 읽는다
♧ 11월이 전하는 말 - 반기룡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끔쩍하지 않을 곧은 보행을 하고 싶네
한 사람 또 한사람이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올곧은 모습으로
어기여차 어기여차
장단에 맞춰 풍악에 맞춰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시네
삭풍이 후려쳐도
평형감각 잃지 않을
온전한 11자로 자리매김하고 싶네
♧ 11월 -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 11월을 맞으며 - 안숙자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겸손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따스해진 마음으로
두발로 우뚝 선
건강한 너를 맞는다
두 사람이 마주선 듯
다정한 11월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 감싸주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을 닮은
너를 배우고 싶다
험한 눈보라가 몰아쳐도
세찬 비바람이 불어와도
두발로 힘차게 버티며
미동도 하지 않을 너이기에
너를 닮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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