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첫눈 내린 눈밭에 가다

김창집 2015. 11. 27. 18:12

 

어제 아침부터

한라산 기슭에

눈다운 눈이 내렸다 해서

오늘 산행 계획을 바꿔

첫눈 내린 눈밭에 다녀왔습니다.

 

눈이 쌓인 오름에 간다니까

춥고 험하고 푹푹 빠지고 그래서 힘들까봐

은근히 걱정을 하다가

처음으로 참가한 한 사람

 

눈길을 걸으니 춥지 않아

오히려 따뜻하고

눈이 나뭇가지에 붙어 연출한 풍경에

연신 환호성을 올리다가

삼나무 숲을 하얗게 밝힌 장엄한 광경에

영화 같다고 감탄을 거듭한다.

 

넓은 눈밭에 이르는 순간

겅중겅중 뛰다가

벌렁 자빠져도 보고

어린애가 따로 없습니다.

 

눈은 그런 마력을 가졌거든요.

오기를 잘했답니다.

   

 

♧ 첫눈 - 권경업

 

능선으로 하얀 서릿발 돋더니

겨울이

여린 가을을 덮치며

하늘가로부터 몰려왔다

삭풍이 방황하는 이들

집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을 위해 함박눈

뼘넘게 첫눈으로 뿌렸다

 

토담방 아랫목

숨죽은 당목홑청 이불을 덮고

오글거리며 사는 애옥살이

한 홉에도 배부를 수 있고

한 섬에도 모자랄 수 있는 것이

세상살이임을

텅빈 들녘 거친 산비탈도

쌓여가는 첫눈으로 푸근하고

긴긴 겨울 밤

사랑으로 나눌 마음 있어

넉넉하다

 

 

♧ 첫눈 엽서 - 허명

 

그리움 하얗게 가슴 저리어

숨 가쁘게 눈꽃 피던 날

사랑은 지쳐 목 메이는 데

첫 눈 오면 만나자던

사랑의 음악 흐르던 조용한

추억의 카페 창가에도 눈이 쌓여서

찻잔에 외로움 녹아 지치면

메아리처럼 돌아와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데

기다림의 세월 추억으로 껴안고

어둠은 순백의 몸부림 가등(街燈)으로 내어걸고

눈길이 상처였음을 가슴춤에 숨기우고

하얀 울음 끊어진 안부를 묻듯

밤길 서둘러 슬픔 부축 받으며

쌓인 눈만큼 소복소복 사랑은 깊어

참아온 고백 순백의 언어로

첫눈 밟고 하얗게 오시렵니까?

 

 

♧ 첫눈이 오면 - 변종윤

 

다시 돌아가고픈 時節이있습니다

하얀 눈을 밟으며 오솔길을 걷노라면

가슴 설레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연 만큼이나 소박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 첫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뒷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나뭇가지에 눈꽃처럼

맑은 눈동자 새까만 눈썹위에

하얗게 덥힌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첫눈 - 권도중

 

다시 눈 오거든 만나서 걸어요 우리

 

당신은 차고 흰 눈 가지려면 눈물 되는 눈

아득히 높은 나목裸木 가지에 내 그리움만 찔립니다

 

나는 들개처럼 고향 들판 헤매다 지쳐

눈 덮힌 버들개지 얼어붙은 개울가에라도

당신을 맑은 공기처럼 간직하겠어요

 

당신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타는 노을에

 

잔설이 남아서 사랑은 괴롭습니다

한밤엔 달빛 받아서 나의 계곡은 전설입디다.

 

 

♧ 첫눈 - 김정란

 

그녀는 창가에 서있다

읽던 책은 몇 페이지 남지 않았다

 

그녀는 본다

사물들 눈부셔하며

고요히 일어나

적요 속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그녀는 적요 속으로 되돌아간 사물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낮게 덧붙인다

‘근원적인’이라고

 

그녀는 책을 가슴에 끌어 안는다

 

토끼 발자국 저 멀리 종종대며

흰 눈 위를 달려온다 이윽고

책장이 눈밭 끝에 이어진다 까만 토끼 발자국

재재거리며 폴싹거리는 까만 글자들

 

바람, 그녀의 몇 장 남지 않은 가슴을

조심스레 넘긴다 눈발을 날리며 까만 글자들

떨어진다 토끼 발자국 송송

 

그녀의 책-가슴으로 들어온다

지워진 글씨들 침묵의 혀로

말하기 시작한다

적요 문득 희디 흰

 

 

♧ 첫눈 - 박소향

 

처음으로

마음 모두 가져간 첫 사람처럼

끝내 비우지 못한 가슴이여

 

젊은 날의 틈새 가득 매우며

한 줄의 바람에도

흐득 안겨드는 설렘이여

 

아아, 이 눈처럼 나도

그대 가슴에

한 희망이고 싶어라

 

눈부신 그 살갗에

순간의 쾌락이어도 좋으니

그대 앞에서 나

첫눈처럼 무너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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