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엔 아직도 따지 않은 감귤이 많은데
다시 비가 내린다고 한다.
올해는 왜 이렇게
비가 많은 해인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서도
비오는 날이 너무 잦다.
울적한 날 혼자서 창가를 내다보다가
우리詩 12월호를 꺼내들고
박주가리 씨앗을 날려본다.
♧ 추정 - 정순영
갈바람에 단풍 드니
울적한 마음
그리움 피어오르는
추억 속에
쓸쓸한
나그네
눈 감으니
그녀의 목소리
애틋한 눈빛이
가슴에 흐느끼네.
♧ 잘 지내시는가 - 송문헌
한 해가 저무는 산마루
비워야 할 때를 일러주는
겨울 산이 모두를 내려놓는다
뒤돌아보니 굽이굽이 물결치는
고단했던 산길이 아득히
아쉬움으로 멀어지고 멀리
멀리 떠나더라도 내
가슴에 있는 한 이별한 것이
아니라 했던가 되살아
달려오는 불처골 망나니*
이 한겨울 잘 지내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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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골 망나니 : 지난해 연말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죽마고우.
♧ 독작(獨酌)하는 밤 - 윤석주
-공취헌* 봄밤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운다. 실바람에 자목련 꽃잎 지는 소리 가슴으로 듣는다. 계절은 오고감이 확실하여 마른가지마다 징표의 꽃등을 매다는데, 나는 시집이나 월간지 나부랭이를 뒤적거리다가 넋 놓고 앉아 있다. 비감이 들어선지 돋보기안경 밑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렁그렁한 눈에 환시처럼 스쳐간 사람들이 여울진다. 사랑했거나 미워했거나 스쳐간 인연들이 지는 꽃잎처럼 아렴풋하다. 돌이켜 보면, 한 生 이 술잔을 들고 놓는 것처럼 빨리 지나갔었다. 지나간 날들은 괜찮았느냐고 자문해 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술잔을 홀짝인다. 앞으로 남은 날도 강대나무처럼 썩지 않은 지독한 외로움 때문에, 달빛 괴괴한 밤이면 또 혼자 홀짝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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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聚軒 : 필자의 작업실이 있는 전남 곡성에 있는 고향집.
♧ 눈 오는 밤 - 채영조
처음 마주친 눈동자
아직도 갓ㅁ에 두근거린다.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은 건
찬 공기가 맑은 겨울이었다.
허물어져가는 돌담 돌아
가로등 불빛은
어둠을 묵묵히 밝히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문창살 틈으로 뛰어든 달빛
움켜잡고 돌아눕는 밤
살포시 뒤꿈치 들어
마루청을 나서면,
눈은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눈 위에 길을 만든다.
한 발 한 발 따라나서는 흔적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길이다.
달은 숨은 지 이미 오래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 정방폭포 - 류인채
어떤 꼿꼿한 자존심이 저렇게 추락할까
부서지는 파편들 소沼에 가득하다
달려온 제주바다가 앞자락을 벌려
울음을 끌어안는다
덥석덥석 안기는 폭포
순간 바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그 품을 떠나 객지를 헤매다가
어느 절망의 끝에 서 있을 때
까마득한 벼랑 아래 어머니가 서 있었다
♧ 빈집 - 오명현
바람이 분다
외딴곳 빈집이 철망 뜰채로 바람을 뜬다
손잡이뿐인 뜰채로 바람을 뜬다
아무것도 없는 뜰채로 바람을 뜬다
어깨가 아프다
팔뚝이 아프다
빈집이 기침을 한다
지난밤 꿈에 기도에 눌어붙어
끝내는 돋우어내지 못한 가래를 털어내려는 듯
빈집은 등이 굽었다
잦은 기침에도 찾아오는 이 늘 바람뿐
바람은 뼈를 관통한다
뼈는 반쯤 삭아
등은 더 이상 굽힐 수 없다
밭은기침조차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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