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락냉이꽃 - 김내식
낫으로 싹둑 베어버린
벼논에 얼음 얼고 눈 내리다
봄날이 찾아오면
논바닥, 거기
코딱지만한 하얀 꽃이
죽지도 못하고
되살아나는
벼룩이꽃
가난이 팔자인 어머니도
부황 든 얼굴에 그걸 뜯어 먹으며
새롭게 자라는 나를
날마다 웃으며 바라보았네
그런데 나는
나는….
♧ 꽃은 영원히 자신의 비밀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 김주혜
15년만에 개방된 제주도 돈내코 숲에는
야생버섯이 수두룩 살고 있다
학회에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버섯들이
축포를 터뜨리며 모락모락
포자를 날리며 깜쪽같이 살고 있는 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말똥버섯, 솔방울털버섯, 꼬마방귀버섯, 흰광대버섯,
뿐이랴,
꽃구름버섯, 오징어버섯, 족제비눈물버섯, 달걀버섯,……!
수억만 년의 시공을 건너온 바람이
먹이를 물어다 주고
탐라의 지층 밑에 잠들어 있던 씨앗이
소리 없는 활시위로 이어져온 은밀한 거래
내 블로그 다이어리 카테고리는
개방되지 않은 나만의 숲이다
그곳에 갇혀있는 글자들은
희귀버섯들보다 더 긴밀한 작업들을 한다
m 이라는 꽃구름 같은 이름으로
@ 라는 말똥 같은 이름으로
& 라는 솔방울털 같은 이름으로
Q 라는 달걀귀신 같은 이름으로
그들은 내게 돈내코 숲속보다 더 깊고
음습한 거래를 원할 것이다
그 화려하고 달콤한 겉모양에 속아 자칫
전신에 독이 퍼지지 않도록 굳게 잠가둘 일이다.
♧ 숲 - 이인평
당신은 지금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셨습니까?
당신은 숲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바로 숲의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당신이 있어 숲이 되었고
당신이 함께 있어 어우러진 까닭입니다
♧ 봄눈이 가렵다 - 진란
그대라는 꽃잎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어색하던 첫 만남처럼
쑥스러운, 무성한 그대의 안부가 훌훌 날아온다
뭉텅뭉텅 어디에 숨겨두었던 말인지
손을 내밀면 금세 눈물로 글썽이는 솜 눈이
하염없을 것처럼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닿자마자 사라지면서도 무심코 던지던 말처럼
내 어깨를 툭 툭 건들고 가는구나
꽃잎 같은 그대
그 날의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길
간신히, 손 내밀어 잡지 못하던 고요를 뭉치며
주머니 속의 손난로만 만지작거렸었지
두 마리 짐승만 남아 서로의 어깨를 물어뜯으며
여우 구름 피어오르는 골짜기에 묻히고 싶다던
그 생각이 차갑게 뺨을 때린다
잊혔다고 접어버린 마음 위에 봄눈 흩날린다
산 벚꽃 질 때처럼 글썽이는 입술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눈 시린 그대
불투명했던 겨울을 보내는 마지막 인사는
가볍고
차갑고
쓸모없는 잔정처럼 무책임한 봄눈 같았다고
봄눈 날린다
♧ 산은 흐른다 - 황의형
운해에 빠져 우듬지만 내밀고
여백의 흐름 속에 떠 있는 섬 섬들
아픔들 세속에 묻어 둔 채
침묵에 잠긴 흐름은 이어진다.
가슴에 이는 바람 운무로 닦아내며
유유히 흐르는 잔잔한 얼굴들
푸른 하늘과 입맞춤하는 아득한 장관
저무는 버둥거림이 이렇듯 아쉬울까
내려앉은 세상 속은
오욕칠정에 헤매는 중생들
날아보겠다는 산의 후예들로 가득할 것이나
흐드러지게 피었다 흩날리는 꽃
강물 굽이굽이 따라 흐르고
파도에 하얗게 부서지는 백사장의 젊음들
궂은 날 마른날 이겨낸 열매들 영글어
황금벌판의 풍요로운 물결로 이는
오색 단풍들 뭉게구름으로 두둥실 떠나가면
눈보라에 묵언 수행 중인 나무들 눈물 나고나
운해 속의 우듬지들 무거운 침묵
덧없는 인생길 암시하렴인지
흐름은 바다로 점점이 이어진다.
[사진 : 납읍금산공원에서, 201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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