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그배나무 그늘에서
누가 불러 오셨나 아그배나무 그늘에
상처받은 마음은 그냥 내려놓고
실핏줄 환히 보이는 연분홍꽃으로
아침이면 이파리에 대롱대롱 이슬 달리듯
살다보면 그렁그렁 눈물이야 없을까만
그런 날 아그배나무는 자꾸 손짓한다
사랑과 미움이 버무려진 유월에
유혹일까 위무일까 휘파람새 절인 울음
그대가 내미는 그늘, 꽃등 하나 흔들린다
♧ 배롱나무
길을 가다 시선이 멎네
길모퉁이 목백일홍
품위도 품위지만 흔치 않은 미인이다. 조금은 엉큼하게 밑동 살살 긁어주면
까르르 까르르륵 까무러칠듯 몸을 떤다. 필시 바람 때문은 아닐 거다. 뽀얀
피부며 간드러진 저 웃음, 적어도 몇 번은 간지럼 타다 숨이 멎은 듯
그 절정
어쩌지 못해
한 백여 일 홍조를 띤다
♧ 자목련 두 그루
나의 작은 뜨락엔 자목련 두 그루가 있다
더러 손이 갔지만 직선과 곡선을 품어
휘어도 꺾이지 않는 품성도 지니고 있다
지난여름 태풍으로 잎들은 남루했다
그 형상 마주할 땐 4월은 없다 했는데
만삭된 꽃봉오리들
또다시 봄 불이다
우리네 입소문은 번지다가 멈추지만
자목련 봄 불은 절정이 돼야 꺼진다
겨우내 아꼈던 말을 한꺼번에 쏟는 거다
얼핏 보면 오늬 같고 다시 보면 부부같다
어깨를 감싼 듯이 따스한 봄날 오후
양 볼에 홍조를 얹은
꽃송이 꽃송이들
♧ 술패랭이꽃
그냥
봤으면 됐지
무슨 말을 또 하려고
낮술에 불콰해진 내 고향 불알친구!
동구 밖 전송 나왔다
윤칠월
술패랭이꽃
♧ 담쟁이
위험해요
맨손으로
벽을
타 오르는 건
믿음이지요
한 가닥 자일에
목숨을
내맡기는 건
기어이
쏟아붓네요
서늘한 별빛 몇 섬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경업 시집 '자벌레의 꿈' (0) | 2016.06.03 |
---|---|
'우리詩' 6월호와 박새꽃 (0) | 2016.06.01 |
'산림문학' 23호의 시들 (0) | 2016.05.23 |
정예실 첫시집의 시들 (0) | 2016.05.20 |
'산림문학' 정호승 초대시 (0) | 2016.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