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짚신나물로 시작하는 아침

김창집 2016. 8. 17. 08:17



어젯밤은 열대야에 속하는 27도로 시작해서

아침 25도까지 내려갔는데도

선풍기도 안 켠 채 숙면할 수 있었다.

조금 차이인데도 느낌이 다른 건

아마도 바람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불투명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강렬한 아침 햇살이

컴에 앉은 나를 몰아내려 한다.

 

언제면 이 더위가 삭 가실는지

오늘도 더위와 싸울 준비는 미약하다.

 

한여름 풀밭을 달구는 짚신나물.

어찌해서 이름에 짚신이 들어가는지,

옛날 서민이면 누구나 신었을 짚신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더위와 맞서려한다.

    

 

 

짚신나물 - 김승기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이름이 이럴까요

아름다웠던 추억 있었나고요

나물로 먹었다는 기억

있는지조차 아득해요

모든 사물의 이름엔 사연이 있을 텐데,

너무 흔해서 그런가요

이젠 소용없는 짚신짝 버리듯

오래전에 잊혀진 이야기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네요

잊혀진다는 거

참 서글퍼 눈물 나네요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바치겠다더니,

임 따라 천릿길도 마다 않겠다더니,

모두 한때의 헛말이었나요

떠난 사랑

붙잡는다고 되돌릴 수 없겠지만,

지나치는 바짓가랑이 붙잡고

자존심도 없이

옷이건 터럭이건 자꾸 달라붙으며 매달리고 싶은 건

한번이라도 어여쁘게 보아달라는 절규

사랑에 목이 타는 몸부림 아니겠는지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이미 잊혀진 사랑인데,

아픔도 외로움도 함께 오래하면

정다운 친구 되겠지요

눈물 속에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는 말

웃어넘기며 꽃 피울 수 있겠지요

    

 

그대에게 사랑을 묻노니 - (宵火)고은영

 

나는 그대에게

얼마나 아픈 존재인가

그대의 심장을 가르고 보라

얼마나 수 없는 사랑이 죽어 갔는지

 

나는 그대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얼마나 소중한가

어떤 무게의 비밀보다

내가 더 아릿다운가

 

그대의 정체에

숨기운 내 그림자가

얼마나 큰지 보라

삼백 예순 날

나를 묻은 그대 가슴이

사실은 너무 저리던가

 

나의 가난에 불을 지르고

무너지는 가슴을 일으켜 세워 보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이어도

그대의 끓는 피로 키워낸 꽃이 아니면

꽃이라 부르지 마라

 

넋이 부대끼는 고통의 짚신을 신고

사랑은 눈물의 강을 건너며

신새벽 일어나는 물안개 처럼

스스로도 조요하여 잔잔히 흐르나니...

      


분노의 계절 - 임영준


애당초

순순히 손잡아 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극심한 일교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풍토에 대해서도

이미 각오한 바 있었지만

신천지에서 벌어지는

텃새들의 기득권 보전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를 깔아뭉개는 것은 기본이고

접신을 빙자해 거들먹거리는 행태가

군락에 만연되어 있었다

어수룩한 핫바지 등골을 후려

아흔아홉 칸을 이어 붙이고

제 식솔만 잘 간수하면

대성한 줄 알고들 있었다

둥지를 깨부수고 뛰쳐나온 처지라서

다시 돌아갈 수 없고

절대 되돌리지도 않겠지만

농간에 탁월한 그들을 보면서

따사로운 봄볕을 거부하게 된다

차라리 혹독한 됫바람을 맞더라도

삼베를 걸치고 짚신을 꿴

후줄근한 불뚝 삿갓이 되고 싶다

    

 

잃어버린 사내 = 오세영


밤이슬에 젖으며 걸어왔다.

 

홑적삼에 짚신발로

걸어도 걸어도 먼 서역길

달을 향해 짖는 개처럼

진달래숲을 넘었다.

 

연기에 그을린 달과 이마에서 떨어지는 별,

상심한 두견새는 굴뚝에서 울었다.

 

밤이슬에 젖으며 걸어도 걸어도

그 사람은 어디 있는가.

서구로 가는 길 위에서 헤매는

혜초, 혹은 아버지 얼굴,

혹은 길을 물어오는 남루한 사내,

 

연탄을 가득 지고

전주시 인후동이 어디냐고

그때 그 주소엔 누가 사느냐고

묻고 돌아서는 초라한 모습.

밤이슬에 젖으며 걸어도 걸어도

전에 본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고방 - 백석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

래도록 남아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촌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

에 두부산적을 께었다

 

손자 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 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둑둑

이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4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의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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