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흰어리연이 촛불을 켜들고

김창집 2016. 8. 18. 07:31


지난 금요일

교육차 찾은 제주4.3평화공원.

 

영상관을 거쳐 전시실을 나와

추념광장으로 가는 길,

 

작고 기다란 연못에 수련이 피었길래

다가가 보니, 가장자리에 이 흰어리연도 피었다.

 

너무 깊어 가까이서 다가가지 못하고

보통 렌즈로 위에서 그냥 찍었다.

 

마치 작은 촛불을 밝히고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 같다.

        

 

어리연꽃 - 김승기


꿈속에서라도

꼬옥 한번은 만나고 싶은

얼굴

 

늘상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다가도

단 하루

반짝 맑은 날이면

내 가슴 어리연 연못에

박꽃 닮은

연꽃 피는데

 

잠겨드는 산 그림자

흰 구름만 동동 물 위에 떠서

 

꽃은 피는데

 

그렇게 꽃 속에 어리며

물안개로 피어오르는데

 

바로 엊그제 본,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

 

, 어머니이!

    

 

어리연꽃에게 말걸기 - 박이현


의암호 안개어린 새벽

연잎 위에 밥알처럼 붙어 있다가

아침햇살에 녹아버리는 어리연꽃

 

세상 잎에 얹혀 일렁이는

나는 식은 밥 한 덩어리

 

어찌 그리 쉬 가느냐고

몰래 물어 보고 싶었다.

 

어리 어리 어리연꽃

이쁘기도 한 이름

 

피고 짐이 어디 뜻대로인가

다시 오기 위하여

새벽에 잠시 오셨다 가시는 천사

 

홀로 있을 때

더 가까워지는 우리.

        

 

어리연꽃 - 김종제

 

진흙의 연못 속에서

한 시절 보내신 어머니

머리에 빗질할 틈이 있었겠느냐

치마저고리 가다듬을 새 있었겠느냐

일천구백에서 이천까지 오가며

등에 쇠를 지고 머리에 바위를 이고

손으로 가시 많은 나무를 잡아끌며

부서진 다리를

목만 내밀고 물 건너 왔는데

비는 가슴을 치고 바람은 얼굴을 때리고

날은 죽어라 하고 어두워지는데

가위로 함부로 찢어놓은 생을

달빛 한 점으로 들고 계셨다고 한다

이놈의 세상은 또

흙탕물 속에서 꽃 필까 두려워서

눈 감게 하고 입 틀어 막고

귓가에 지저귀는 새 소리만 들려주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세수도 못하시고 아침부터 챙기시는

그때 어머니가

손이고 발이고 젖가슴까지

어디서고 잘도 견디고 참아낸

어리연이었음을 뉘가 알았겠느냐

어머니 그 속에 나 있었을 때도

어리연꽃 피면 그렇게 좋아했다고

    

 

 

연못 - 제산 김 대식

 

개구리, 눈만 빠끔히 물 위에 내밀다

어리연꽃 하얗게 핀, 잎 위에 올랐다.

왕잠자리 수면에 꼬리를 찍어 대다

놀라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고

물뱀이 물 위로 슬며시 지나간다.

 

왕골 잎 사이로 외롭던 실잠자리

사랑의 짝을 만나 즐거운 오후

물뱀이 뱅글뱅글 물 위를 맴도는데

물거미 이곳저곳 일없이 서성인다.

 

물속을 연신 곤두박질치던 오리

물 밖으로 나와 깃털 손질하고

족제비 연못가에 두리번거릴 때

뜸부기 새끼들 데리고

갈대 속으로 숨는다.

        

 

고담사 마애불입상 - 목필균


온몸에 청태가 앉도록

누워보지 못한 정진의 천년

부처님 동공에 각인된

천왕봉이 구름 위에 있다

 

비구름 내려앉아도

천축으로 가는 길 보이는 곳

묵묵히 내려다보던

천년 마애불 품안에

먹물옷 하나

고단한 날개 접는다

 

칡넝쿨로 뒤덮인

모진 상념 줄기들

자르고 버리고

비우고 채우면서

끝없이 돌아온 고행길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오직

스님다운 스님 되자는

원 하나로 기도하는 도량에는

백련 어리연이

햇살 품어 영글어 가고

 

중생들 귓가로 찾아가는

심진스님 찬불가는

굽이굽이 준령을 넘더니

어느 새

넓은 연잎에 은구슬로 구른다

    

 

 

어리연꽃 - 권순자

 

빗방울들 들이친다

무성한 잎사귀들 사이로 여린 꽃송이 내밀었다

진흙탕 딛고 올라선 저 내밀한 힘이

화관을 밀어올린 것이다

 

자그마한 할머니 화관 바구니 들고서 전철 안에 피었다

한 푼 두 푼 빗방울들 떨어지듯 순간순간 찰랑대는 소리

잠시잠시 환해지는 물결들 잔잔히 조금씩 퍼져나가면서

승객들, 선선한 얼굴들 모두가 다 잎사귀로 떠 흔들린다

물 위에 서로 내놓은 얼굴들, 서로 다른, 연의 잎사귀들

하지만 물 아래서는 서로 엉기듯이 의지하여 살아가니까

여리디여린 꽃잎 내민 작은 할머니의 화관 바구니는 결코

외롭지도 않아, 어두운 물밑을 지팡이 한 자루로 더듬어가며

지탱하는 힘, 질퍽한 이 세상에 여름 비 시원하게 맞으면서

고운 꽃부리 한 다발을 활짝 피워 올려놓으신 것이다

 

도드라진 힘줄 선 팔, 가녀린 목 꼿꼿이 세우시고서

긴 우기를 고집스러이 견뎌나가시는, 연약하게도

단단한 저 어리연꽃 한 송이,

 

천천히 천천히 물길을 헤쳐나가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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