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교육차 찾은 제주4.3평화공원.
영상관을 거쳐 전시실을 나와
추념광장으로 가는 길,
작고 기다란 연못에 수련이 피었길래
다가가 보니, 가장자리에 이 흰어리연도 피었다.
너무 깊어 가까이서 다가가지 못하고
보통 렌즈로 위에서 그냥 찍었다.
마치 작은 촛불을 밝히고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 같다.
♧ 어리연꽃 - 김승기
꿈속에서라도
꼬옥 한번은 만나고 싶은
얼굴
늘상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다가도
단 하루
반짝 맑은 날이면
내 가슴 어리연 연못에
박꽃 닮은
연꽃 피는데
잠겨드는 산 그림자
흰 구름만 동동 물 위에 떠서
꽃은 피는데
그렇게 꽃 속에 어리며
물안개로 피어오르는데
바로 엊그제 본,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
아, 어머니이!
♧ 어리연꽃에게 말걸기 - 박이현
의암호 안개어린 새벽
연잎 위에 밥알처럼 붙어 있다가
아침햇살에 녹아버리는 어리연꽃
세상 잎에 얹혀 일렁이는
나는 식은 밥 한 덩어리
어찌 그리 쉬 가느냐고
몰래 물어 보고 싶었다.
어리 어리 어리연꽃
이쁘기도 한 이름
피고 짐이 어디 뜻대로인가
다시 오기 위하여
새벽에 잠시 오셨다 가시는 천사
홀로 있을 때
더 가까워지는 우리.
♧ 어리연꽃 - 김종제
진흙의 연못 속에서
한 시절 보내신 어머니
머리에 빗질할 틈이 있었겠느냐
치마저고리 가다듬을 새 있었겠느냐
일천구백에서 이천까지 오가며
등에 쇠를 지고 머리에 바위를 이고
손으로 가시 많은 나무를 잡아끌며
부서진 다리를
목만 내밀고 물 건너 왔는데
비는 가슴을 치고 바람은 얼굴을 때리고
날은 죽어라 하고 어두워지는데
가위로 함부로 찢어놓은 생을
달빛 한 점으로 들고 계셨다고 한다
이놈의 세상은 또
흙탕물 속에서 꽃 필까 두려워서
눈 감게 하고 입 틀어 막고
귓가에 지저귀는 새 소리만 들려주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세수도 못하시고 아침부터 챙기시는
그때 어머니가
손이고 발이고 젖가슴까지
어디서고 잘도 견디고 참아낸
어리연이었음을 뉘가 알았겠느냐
어머니 그 속에 나 있었을 때도
어리연꽃 피면 그렇게 좋아했다고
♧ 연못 - 제산 김 대식
개구리, 눈만 빠끔히 물 위에 내밀다
어리연꽃 하얗게 핀, 잎 위에 올랐다.
왕잠자리 수면에 꼬리를 찍어 대다
놀라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고
물뱀이 물 위로 슬며시 지나간다.
왕골 잎 사이로 외롭던 실잠자리
사랑의 짝을 만나 즐거운 오후
물뱀이 뱅글뱅글 물 위를 맴도는데
물거미 이곳저곳 일없이 서성인다.
물속을 연신 곤두박질치던 오리
물 밖으로 나와 깃털 손질하고
족제비 연못가에 두리번거릴 때
뜸부기 새끼들 데리고
갈대 속으로 숨는다.
♧ 고담사 마애불입상 - 목필균
온몸에 청태가 앉도록
누워보지 못한 정진의 천년
부처님 동공에 각인된
천왕봉이 구름 위에 있다
비구름 내려앉아도
천축으로 가는 길 보이는 곳
묵묵히 내려다보던
천년 마애불 품안에
먹물옷 하나
고단한 날개 접는다
칡넝쿨로 뒤덮인
모진 상념 줄기들
자르고 버리고
비우고 채우면서
끝없이 돌아온 고행길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오직
스님다운 스님 되자는
원 하나로 기도하는 도량에는
백련 어리연이
햇살 품어 영글어 가고
중생들 귓가로 찾아가는
심진스님 찬불가는
굽이굽이 준령을 넘더니
어느 새
넓은 연잎에 은구슬로 구른다
♧ 어리연꽃 - 권순자
빗방울들 들이친다
무성한 잎사귀들 사이로 여린 꽃송이 내밀었다
진흙탕 딛고 올라선 저 내밀한 힘이
화관을 밀어올린 것이다
자그마한 할머니 화관 바구니 들고서 전철 안에 피었다
한 푼 두 푼 빗방울들 떨어지듯 순간순간 찰랑대는 소리
잠시잠시 환해지는 물결들 잔잔히 조금씩 퍼져나가면서
승객들, 선선한 얼굴들 모두가 다 잎사귀로 떠 흔들린다
물 위에 서로 내놓은 얼굴들, 서로 다른, 연의 잎사귀들
하지만 물 아래서는 서로 엉기듯이 의지하여 살아가니까
여리디여린 꽃잎 내민 작은 할머니의 화관 바구니는 결코
외롭지도 않아, 어두운 물밑을 지팡이 한 자루로 더듬어가며
지탱하는 힘, 질퍽한 이 세상에 여름 비 시원하게 맞으면서
고운 꽃부리 한 다발을 활짝 피워 올려놓으신 것이다
도드라진 힘줄 선 팔, 가녀린 목 꼿꼿이 세우시고서
긴 우기를 고집스러이 견뎌나가시는, 연약하게도
단단한 저 어리연꽃 한 송이,
천천히 천천히 물길을 헤쳐나가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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