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주에 소나기가 내린 뒤로
마음 자체가 개운하여 살 것 같다.
엊그제 병원에 갔다가
실하게 영그는 밤을 대하고는
가을을 예감하는 듯했는데,
오늘에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8월도 하순으로 접어드는데
아무리 질질 끌어도 가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내일 아침은 완도행 카페리를 타고
진도로 1박2일 탐문회 워크숍을 떠난다.
‘강화도와 진도와 제주를 잇는 삼별초의 자취’를 따라서
주제 발표도 할 예정이다.
♧ 가을 예감 - 조사익
가을 색 빗줄기를 물방울로 뚝뚝 잘라
유리창에 뿌려대는 바람소리가 제법 찬 기운을 느끼게 한다
여름날 숨 고르기 한 번 못하고 크게만, 많게만 부풀려왔던 것들 모두
하늘빛마저 푸름을 멈추고 가을 색으로 물들어간다
비구름 쪼개진 틈새로
햇살 조금 남은 신작로 밑동까지 가을 닮은 석양 밟으며
어디쯤 오고 있을 가을빛 찾아 떠나는 길
후박나무 이파리 속살에서도 갈 빛 향기가 차오른다
여름날 숱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신작로에는
드물지만 가끔 꽃을 피운 코스모스 가녀린 모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보랏빛 향기 진하게 어우러진 맥문동 꽃대, 마저 눕고 나면
되려 허전할지도 모를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에
잠시 고독을 노래하다 슬플지라도 왠지 가을예감이 향기롭다
해거름 노을 다음, 밤 깊어질 때면
어느 별자리는 벌써 가을을 노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가을 예감 - 박금숙
가을이 오려나보네
온몸 서걱서걱
갈꽃 같은 그대 그리운 걸 보니
여름내 헛가지 마구 자라더니
나무들 속살 뜸 드는 걸 보니
과일 익듯 사랑도 익으려나보네
먹구름 훌훌 멀어지고
하늘빛 파랗게 시려오는 걸 보니
한가을 내내
약도 없는 속병을 앓으려나보네
가을 깊어지면
풀벌레 울음에 잠귀 밝아지듯
그대도 내 맘 알거나.
♧ 가을 잎 편지 - (宵火)고은영
어디서나 진실은
가슴에 와 닿는 법이다
감동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무작정 달려나간 강변에서
코스모스 엷은 입술로 하강하는
감청색 하늘엔 몽환의 전설이 뜨고
군무를 이룬 갈대들은
투명한 잠자리 날개 위에
날마다 혼외정사를 꿈꾸며
담채화처럼 트릿한 방황을 하고 있다
아, 한줄기 바람의 미학에도
계절은 잠들지 못해 서성대는
불면 속에 온 밤을 지새우며
풍요 속 빈곤을 오가는 긴 그림자로 드러눕고
고독을 노래하는 외로운 행복으로 우는데
가을은
저만치 바람의 골을 거쳐 예감하는
허무의 빛바랜 가슴으로
그리움이라 이름할 갈 빛 편지들을
끝없이 별처럼 쏟아 내고 있다
♧ 가을 예감 - 반기룡
아침 저녁으로 샤워기에 기댈 때
제법 미지근한 물을 원하고
오동나무에 뱃가죽 비비던 말매미도
크레셴드에서 디크레셴드로 목소리를 낮추고 있네
얼룩배기 황소의 축 처진 불알은
몸 안쪽으로 바짝 끌어 당기고
요란하게 돌아가던 선풍기도 울음을 그친 채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네
여인네의 발걸음은
모데라토에서 라르고로 보폭을 바꾸고
길가에 핀 칸나와 부용화도 잎맥이 닫힌 듯
꺼칠꺼칠한 피부를 한 채 돌멩이만 툭툭 건드리네
무더위에 찌들었던 경운기도
배부른 들녘을 응시하며
황소걸음에서 잰걸음으로 가속을 하고
텅텅거리던 울음소리 한 옥타브 높여 탕탕거리며
더욱 기세를 드높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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