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길이면 어떠랴, 자갈길이면 또 어떠랴
-‘바람의 칸타타’ 41
도봉하늘 발 둥치에 빗발이 후둑이나 싶더니 만장봉 뒷덜미에서 어둑어둑 눈석임 빗발이 불어 닥치네 급강하하는 기온에 산길이 오스스 떨고 산꾼들 종종거리고 관음암 능선 흐드러진 진달래 꽃무더기 덩달아 파랗게 질린다
어지러운 발자국들 비껴나 천축사 길로 접어드니 흥건하게 젖은 형형의 키작은 부처들이 겹겹이 서서 젖은 나그네를 맞아주네 산채를 흔들며 서두는 소리 소리들 못들은 체 우산을 접고 나를 멈추듯이 생각을 멈추려니 먹장 나목들 가슴팍으로 산 벚꽃들을 내 나이처럼 꽃잎꽃잎 흩날리네
꽃이 피고 지고 잎이 나고 잎이 떨어지면 면벽하여 좌선에 드는 산, 도봉산 진달래가 어둑발 속에 떨고 있네 꽃길이면 어떠랴 자갈길이 면 어떠랴 빛나는 詩文이 아니면 또 어떠랴 내 마음이 찾아들어야 할 둥지는 살아있음의 結句, 바람이 먼저 알고 저만치 앞서 내려가는 산길, 오늘은 더더욱 맘 둘 곳 없이 몸만 바람에 흔들리나니
♧ 가을은 슬라이드처럼
-‘바람의 칸타타’ 42
선잠 깨어 잠들지 못하다
커튼 새로 스미는 한기에 창문을 닫으려하니
몇 점 놀란 불빛 눈망울과 둘러선 정물들이
슬라이드 속 흑백 영상처럼 말을 건넨다
(이밤 잠들지 못하는 이가 어찌 그대뿐이겠는가, 저어기 공원 벤치 신문지 이불을 덮어쓰고 뒤척이는 바람 사내의 목덜미 좀 보시게, 여름내 이곳을 떠돌다 며칠 보이지 않더니 어느 결에 고향 길 다녀왔는지 대낮부터 소주와 물씨름 불씨름 하다 여직 저리 몸뚱어리 뒤척이지 않는가)
이리저리 정물의 실루엣을 비춰 보던 가로등 불빛이 천천히 사라지자 다시 정지된 시간이 장막을 드리운다
녹슨 귀또리 소리, 슬몃슬몃 커튼 자락을 들치는데 꼼짝 않던 담장 위 검은 바람이 금속성으로 굴러간다
♧ 소리들을 위한 겨울 랩소디(Rhapsody)
-‘바람의 칸타타’ 43
쿵쿵쿵 발자국 소리 오늘도 어김없이 막일 나가는 옆집 김씨 굽은 어깨, 서둘러 골목을 내려가는 둔탁한 발자국 소리, 덜커덩덜커덩 바람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달려가는 기차소리, 멀리 끊길 듯 이어지는 자동차 경적소리 두부장수 왜장치는 소리, 이따금 녹슨 철대문을 흔들어대는 바람의 외마디소리
하야니 낡은
창유리에 서리꽃 화안하니 피어나는 어둑 신새벽
♧ 쇠바람 소리
-‘바람의 칸타타’ 44
(몹시 취해 귀가한 어젯밤 7번 버튼을 길게 누르고 ‘임마! 긴긴 밤 홀아비 잠자리가 견딜만 하냐?’ 는 둥 괜스레 농사일로 곤히 잠든 사람 깨워 한참을 시답잖은 농으로 그놈 잠을 어지럽혔는데…)
띠리링! 띠리링! 신새벽부터 휴대폰이
다급하게 울어 댄다
‘임 아무개, 별세’
낯선 이별을 선언하는 짧고 단호한 메시지
어둑새벽 쓰나미가 한순간에 들이닥친다
호쾌한 웃음소리만 빈 하늘가지에
남루한 생의 추억으로 걸쳐 놓은 채
갑년 생일을 코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어딘가로 외출가듯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초겨울 쇠바람소리 귀때기 후려치던 그날
고향 산자락 어둔 땅 속에 반백년 바람의 벗을 묻고
가랑잎 소리 따라 풍진 세상으로 내려오던 산길,
그가 비로소 눈깨비 속에서 나직나직, 애원하였다
같이 가자! 나 외로워, 같이 가자
♧ 소리의 넋
-‘바람의 칸타타’ 49
강을 건너가는 낮달의 그림자
먼 데 어둠을 등진 채 달려가는 먼먼 기차 소리
벗은 우듬지에 머무는 바람
신발장 곰팡이 낀 등산화
쭈그러져 누운 단화들
겹치는 바지 허릿단
마른 풀잎 속에서
그러나
다시 피어나는 들꽃
너는 누구, 소리의 넋이더냐
♧ 강물도 가끔은 흔들리는 뒷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
-‘바람의 칸타타’ 50
강물도 가끔은 흔들리는 뒷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
마음 길 한 켠에 일렁이는 강물, 내가 강이고 강물이
너인 것을, 언젠가는 나도 강물로 흘러갈 것을
바람이 불고 내 마음 강물 잔주름 물결이 깊어갑니다
제 몸 들길을 태우며 겨울을 채비하는 논배미
늦은 햇살이 한 줌 기러기처럼 내려앉습니다
♧ 찰나찰나 - 송문헌
-‘바람의 칸타타’ 51
마음은 바람이라 한 시도 머물지 못하고
강은 강물이 지나가는 길일뿐 또한 머물지 못 하나니
우리네 사는 일들도 다 이같아 찰나찰나 지나갈 뿐인 것을
그러나 우리는 모두 마음먹기 나름이라네
흘러가는 강물은 끊임없어 변함이 없고
사는 것 또한 마음 있어 마음먹기 나름이라네
오리무중 허둥지둥 제각각 꽃잎으로 태어나서
사는 것도 혼몽천지 가랑잎으로 떠나가는 것
깨닫지 못한다면야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겠나
♧ 넋의 유배지 마라도
-‘바람의 칸타타’ 52
어느 장벽이 이보다 더 완고하랴
종일 사나운 이빨 드러낸 파도를 거느린 채
마라도 앞바다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눈앞에 번히 황금색 놀이 타는 이어도를 두고도
뱃머리를 제자리에서 맴돌게 한다
출렁일수록 제 안에 갇혀 버리는 제주바다
바다는 먼 신기루에 몸 다는 나그네를 거두어
어둡고 가파른 제 안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이어도는 멀리 있지 않다고
흐린 눈이 버리고 간
내 안에 꿈틀거리는 땅으로 살아 있다고)
작은 암초에 매인 검붉은 욕망들 벗어던지고
작고 가여운 것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주어야 한다고
내 곁에 쓰러진 것들을 일으켜 세우며
길고 먼 밤을 벗어나 새벽 바다에 닿아야 한다고
등 뒤에 마파람 수만 섬을 풀어 놓는다
마라도 파도의 완강한 팔뚝에 갇힌 밤
비로소 내 안으로 안겨오는
오랜 바람의 길 하나를 건진다
내 안에 오래 버려두었던 넋의 유배지 마라도
또 다른 이어도에 먼 심해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 송문헌 연작시집 '바람의 칸타타'(도서출판 예맥, 2008.)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는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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