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오래
흰빛, 보자기에라도
싸오신 것처럼이나
사알짝 내밀어
잡아주었던 것
손길
하나
그런 시간의
곁에인 듯
오래
오래
멈추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 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가을 바다에 오지 마라
가슴에 재가 남은 사람은
가을 바다에 오지 마라
초가을 바다에서는 흙피리 소리가 난다
댓이파리 쓸리는 걸음 무늬를
낮아져 가는 물 위에 새겨 두고
여름의 끝 바람 몇 떨기가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어져갈 때
어디선가 저렇게 소리 구멍을 빠져나와
제멋대로 끼룩이는
가을 바다의 피리 소리 가까이 귀를 적시면
낮아질수록 푸르러지며
주저앉을 듯 한사코 일어서던……
깊은 음절의 계명들
버릴 것들을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사람은
가을 바다 근처에 와서 뒤채지 마라
보낼 것들을 다 떠나보낸 자리에서
초가을의 바다는 혼자서 제 문을 연다.
♧ 목포라는 말
木浦라는 말
木浦라는 말
그 나무나루라는 말과 순정이라는 말과
그 나무나루라는 말과 눈물이라는 말과
그 나무나루라는 말과 어스름이라는 말과
木浦라는 말
나무나루라는 그 이름과, 세상에 와 존재하는
그립고 서럽고 누추한 것들의 호칭들과
그것들을 가리키는 이름들을 살짝 한번 바꾸어
불러보고 싶어지는
그 나무나루라는 단어 곁에 가을날이라고
그 나무나루라는 단어 곁에 조막손이라고
그 나무나루라는 단어 곁에 민들레라고
木浦라는 말
왠지 그렇게 나무나루라는 모국어의 글썽임 곁에
그것들의 내면, 그것들의 깊은 혼백의 옹이까지
살며시 불러내어 함께 놓아두고
바라보고 싶어지는
木浦라는 말
木浦라는 말
木浦는 나무나루라는, 그런 말
♧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 치욕에 대하여
내 안에는 지금도 스승이 하나 살아 있다
언젠가 그에게 참으로 힘없이 무릎을 내준 적이 있다
고개를 조아리고, 시답잖게 눈물을 내준 적도 있다
그때마다 푸른 안광으로, 대나무처럼 꼿꼿하던 스승
입술을 비틀던 스승
회초리를 들어 등짝을 후려치기도 하던
스승은 요즘도 가끔 꿈속 같은 데서 나타나
발을 걸기도 했다, 화를 돋우기도 했다
우라지게도 변함없는 그 모습 앞에서
별수 없이 식은땀에 젖어서 그를 치켜다보았다
스승은 그렇게 아직까지 나를 보내지 아니하였고
차라리, 어느 날엔가 내 안에서 그를
댓바람에 마중 나가고 싶어져서, 저만치서 다가오는
스승의 가슴패기를 냅다 한번 걷어 차버리고도 싶었다
더는 배우고 싶지 않은 스승을 향하여
당신의 괴나리봇짐을 내어주고, 서둘러 그를
하산시켜버리고 싶어졌다
치욕이여, 그래도 그 스승 밑에서
여태까지 한 수 잘 배웠다.
* 정윤천 시집 '구석'(실천문학사, 2007.)에서
사진 : 2016년 10월 2일 영아리오름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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