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10월호(통권340호)가 나왔다.
*주요 목차
☐ 권두 에세이 : 이재부
☐ 신작시 23인 選 : 조병기 정순영 주경림 박정래 문정영 고성만 수원 김성중 조연향 민문자 이윤진 김세형 오미옥 조경진 조정순 박동남 이기헌 정창화 성숙옥 이해원 오명현 전선용 최지원
☐ 기획연재 인물 詩 : 이인평
☐ 신작 소시집 : 조봉익
☐ 테마 소시집 : 나호열
☐ 신인상 발표 : 윤순호 나영애
☐ 여름시인학교 백일장 수상작 발표 : 김종숙 김정인 남대희 사선자 최현서 배향인
☐ 시에 대한 에세이 ; 유진
☐ 한시한담 : 조영임
책을 읽다가 시 몇 편을 골라
제주 특산 한라돌쩌귀와 같이 내보낸다.
♧ 아침 - 조병기
조간신문을 펼치면
잉크 냄새가 향긋하다
창밖 소나무에서 들려오는 까치소리 하고
오늘도 이십일 세기의 태양이 떠오를 거라고 믿는다
늘상 아내가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는 백합도
낼 모레쯤은 방긋이 웃으리라고 기다린다
언제나 아침은 향기로운 사람
하루 종일 곁에 머물었으면
숲길을 걸으며
나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 풀의 생각으로 - 정순영
바람 따라
물안개에 젖은 산마을에 와서
풀의 생각으로
말을 하니
파란 하늘이 열리고
풀잎에 반짝거리는
맑고 눈부신
마음
빨간 우체통에 넣어
아내에게 보내고
한적한 시간 위에 앉아
추억의 백발을 쓸어 넘기니
눈시울에 영롱한 이슬이 맺히네.
♧ 문경새재 길 - 구산 박정래
닳고 닳아 원만해진 고갯길 눈꼬리는
자꾸 아래로 쳐지며 선해지고
누군가에겐 생사生死 희비喜悲였을 명암明暗이
산 그림자처럼 조령에 걸려 있네
그렇게 굽이굽이
인생도 세월도 저 고개 넘어 어디론가 가는 거겠지
봄은 여름을 재촉했을 터,
여름은 가을에 울긋불긋 물리고
이 가을,
한도 끝도 없이 낙엽이 내려
입신출세, 부귀영화, 발복소망,
지난 추억마저 모두 덮여 희미해지는데,
가을 몰고 스며들 겨울처럼
삶은 어느 순간 하얗게 얼어 멈춰지는 것일까
인생 오십 고개 넘어간 모든 조상들의 발자국
거룩해 보이고,
젊은 날의 문경새재 자꾸 발 헛딛어
훠어이 훠어이 꿈처럼 장승처럼 거기 서있네
♧ 예각銳角 - 문정영
밤새 위층에서는 각 싸움이 있었다
몸으로 말로 틀린 각을 잡고 있었다
너를 바꾸기 싫어 조금씩 벌어지는 틈을 들여다보고 있었니
어떤 발자국은 울음이 가 닿지 못한 곳까지 아주 멀리 나갔다가 왔다
그때,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손을 잡으며, 각을 좁혔었는데
불안은 서로에게 밑줄 친 글들이 조금씩 희미해지면서 생기는 것
불안해서 개를 키워 본 적이 있니,
그때 개는 너의 반대편에서 평안해지지
손을 놓아버리기 전에 이미 차가워진 손바닥
그런데 그때 몰랐던 손등이 있었던 것이야, 아픈 것 감싸주는 따뜻한 손등, 우리는 그렇게 겨울의 손을 맞잡고 있었던 것이야
한 칼끝이 다른 칼끝을 날카롭게 찌르듯
눈물은 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야
♧ 9월 - 고성만
고압선 철탑이 서 있는 쪽의 노을은 낮은 바람소리를 낸다 이제 걸음마 배우는 아이처럼 찰칵찰칵 바퀴자국을 내며 낡은 유모차 끌고 가는 할머니를 조심조심 피해가는 자동차들 고압선 철탑으로부터 분류된 주택들이 한두 송이 꽃처럼 피어나는 마을
눈물 빛깔로 하루살이의 저녁을 밝힐 수 있을까 니 시린 하늘은 체온 식어가는 강의 중심에서 말갛게 헤엄쳐 오르나 오르나
그때 들었던 울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짧은 머리카락처럼 바싹 풀을 잘라놓은 숲에 들어서서 제 이름을 부르면 바람도없이 빛이 내리고 붉은 한숨 같은 네 이름을 들으면 빛도 없이 바람이 내린다
♧ 하멜 - 김성중
파란 눈의 네가 대정 앞 바다에서 울고 있다.
스페르베르호는 암초에 부딪쳐 박살났고
벗들은 모래 속에 파묻혀 신음한다.
나가사키 데지마에서 사케 한 잔에
거친 항해의 피로를 풀어야할 너는
은둔의 땅 조선에 갇혀
키 큰 의장대 눈요깃거리가 되었지.
나는 오늘 전라도 강진땅 병영성
700년 묵은 은행나무 아래에 앉아
그날 서녘 하늘 호르쿰을 바라보며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하던 너를 생각한다.
인생은 어디에 불시착할지 모르는 비행선
폭풍우에 키를 잃은 뱃사공처럼
맹목의 바다에서 헤매는 나에게
너는 진즉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 높은 노래 - 조연향
적멸보궁 아래 계단을 내려오며 적멸이라는 말을 잊어버린다 돌각등에서 흘러나오는 푸르스름한 빛 한 줄기로 더러 죽은 벌레 가는 길 끝까지 비추어 줄 수 없다 그들이 죽음이 적멸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다 청설모가 꽃 모가지를 딛고 하늘 길을 뛰어간다
돌층계에 쪼그리고 앉아 주문을 외는 귀뚜라미에 내 숨을 섞는다 전나무가 혀를 세우며 허공을 찔러대고 있다 안개가 저녁 웅덩이에서 피어오르고 새들은 다른 새의 길을 위해울어주기도 하고 날아주기도 한다
♧ 바쁜 여생 - 민문자
고희를 넘었는데도
욕심은 줄지 않아
시 보면 시 하고 싶고
그림 보면 그림 하고 싶고
이 동네도 기웃
저 동네도 기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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