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달빛
등 시린 바람에
잠잠하던 오십견이 도지고
좌골신경통, 퇴행성관절염이
잠 못 이루게 하는,
다들 떠나보낸 깊은 가을입니다.
안쓰러운지, 보다 못한 달빛이
떡갈나무 숲 사이 예리하게 내리 꽂히며
취밭목 여린 등짝에다 한창 침을 놓습니다
♧ 흔들리는 갈대의, 길에게 띄우는 편지
이제 와서 되돌아 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너와 나는 두려움의 강 앞에 서 있다
돌아가자니 온 길이 수고스러웠고, 나아가자니
강은 깊어 헤어날지가 의문이다
설령 건넜다 하더라도 상강(霜降)을 며칠 앞둔
젖은 몸과 마음에 하얀 겨울만 매섭게 기다릴 뿐
뼛속까지 아릴 그 추위를 차마 견딜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너를 무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저 강변의 흔들리는 갈대처럼, 어쩌지 못해
밤새 서걱서걱, 제 속을 비워가며 울고 있을 뿐
여기까지 함께 한 너와의 길에
때로는 부르트고 때로는 갈라지던 그 발과 종아리를
강물에 담그고 서 있어보지만
너와 함께 건널 수 있는, 아니
건너서는 안 될 강임을 나는 안다
♧ 가슴앓이 속병은 도져
어깨 시린 이 계절로 하여
더욱 그리운 이여
가난한 우리의 삶에 살얼음이 끼더라도
나보다 더 큰 모습으로 그대를 바라보고 싶었다
오지 않을 봄날을 꿈꾸는 초라한 베갯머리
어둠을 추스리고 추스려 빚어 낸 말 몇 마디를
등 시린 새벽 푸석한 얼굴로
행(幸)이라 말할 그대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대 곁의 따뜻한 체온이고 싶었다
지금 미명의 어둠 속
건너지 못할 강 앞에서, 서그럭 서그럭
흔들리는 갈대처럼 목이 잠기는
이 나이에도 가끔씩 가슴앓이 속병이 도져
♧ 취밭목 자작 숲
무어라 말할까요
그저 눈멀고 귀 먹었습니다
그대에게 이르는 길
보이지 않고 듣기지 않아
밤낮이 무슨 소용 있을까만
이 가을처럼 깊어 가는
한숨 가득한 가슴앓이 속병
그리움의 이편은 내가 아닐지라도
그리움의 저편에 있는 이여
그대로 하여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을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 제 빛깔을 지켜온 저 조신한 단풍잎을, 차마
초봄 여린 새순일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운명이거니 여기며
가꾸고 지켜 온 연둣빛이나 진초록을
이제 서리 내리는 가을은 깊고 밤은 길어
아침저녁 어깨 시린 찬바람에 마음은 묘해
저렇게 겉이라도 발갛게 물들이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느냐
젊은 날의 우여와 파란
그 숱한 유혹의 바람 앞에서도
조신한 몸가짐은, 거부의
손바닥 설레설레 내저으며
제 빛깔 지켜온 저 단풍잎을, 차마
♧ 흔들리는 억새의 흔들리지 않는 하얀 기다림
새잿마루에 서서, 가을볕 여린 오후 내내
흔들며 흔들리는 네 모습은
쉬 마르지 않는, 새벽 한로 찬이슬에
젖어 시린 그 머릿결 때문이 아니라
이 가을이 다 가도록 흔들리는
그러나 끝내 흔들리지 않을
누군가가 오지 않음을 탓하지 않는 억새의
하얀 기다림이 아름답구나
언제부턴가 새벽잠 한두 시간씩 달아나는 네게도
오지 않을 이라 마음먹은 이 오래 전 일이었지만
오지 않음은 그의 일이고 기다림은 나의 일인데도
나는 왜 마른 가슴으로 기다리지 못하는가
젖어 시린 가슴을, 저 여린 가을볕에
열어 말리지 못하는가
♧ 용담꽃
무서리 내려 서러운 건
그대만이 아닙니다. 그대를
바라보는 나도 서럽습니다
짙은 가을빛의 꽃이여!
시월 취밭목의 하늘 아래서는
누가 누구를 보더라도 다 서럽습니다
♧ 저 가여운 들국화를, 누가
세상이 다 애처로운 아침입니다
취밭목 길섶 제 혼자서 피어
한로 찬이슬이라고 끝내 우기는
저 가여운 들국화를, 누가
밤새 눈물 가득 머금게 하였습니까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사진 : 지난 일요일(10.9) 마보기오름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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