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54호의 시조

김창집 2016. 10. 8. 22:59

* 독일잔대


연밥 - 김연미

 

하늘이 감춰놓은 반고딕체 암호문 


그 진본 앞에 놓고도 풀지 못한 울음들이 

 

또 다른 꽃의 풀이를 불쑥불쑥 올리며

 

질펀해진 날들을 켜켜이 쌓다보면


질펀한 슬픔이 뭉쳐 단단해진 작은 방

 

환하게 꽃의 뿌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머체왓에서 - 김영숙

 

여름날 오이지 같네

손 꼭 잡은 남녀가

 

잎조차

숨을 참는

반백의 소롱콧길

 

서로의

발소리 들으며

 

길을 가네

한 그루

나무.

     

 

 

이어도는 세일 중 - 김정숙

 

저기, 저 꽃밭 좀 봐

곳곳이 금맥이래

연삼일 비 내리며 그려 놓은 바코드에

빨간불 깜박거리며 섬이 몸살 중이다.

 

바다로 떠오른 해

바다로 질 때까지

삼시 세끼 밥술이나 뜨며 산다는 요즈음

이상향,

그 땅이 여길까

풀꽃들은 터지고.

 

날마다 새 주인 섬기는

제주 꽃이 바쁘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아무나 쫓아가는 땅

내일은 어딜 내 놓을까

삶을 거래 중이다.

     

 

무빙위크 - 김진숙

 

이대로 당신은 나에게서 내릴 수 없다

걷다가 다시 뛰다 출구 찾는 어깨 너머

저만치 앞선 꽃들도 끝장나는 길이다.

 

누군들 등 떠밀려 살아온 날 없겠는가

발랄한 여행가방에 귀걸이를 단 분꽃들

세상에 발자국 하나 까맣게 찍고 간다.

     

 

꽃불 - 장영춘

 

누가 긴급하게 소방차를 불렀나

 

한라산 선작지왓 벌겋게 타는 철쭉

 

온종일 끄지 못하네 내 그리움의 방화범

     

 

 

호박네 식구 - 한희정

 

씨앗 한 알 심었더니

초록 우산 들고 온 식구

나눠 마신 물 반 컵에도 감지덕지 떡잎을 펴며

며칠 밤

두고 본 사이

한 매듭을 올린다

 

공한지 땅값조차

수직 상승한다는 요즘

과수원 돌담 위를 더듬더듬 거리더니

봉긋한

애호박 덩이가

출산일을 알린다

 

 

 

큰엉* 앞에서 - 홍경희

 

어느 아비인들 구멍 하나 없으랴

바람이 잔잔해도 파도치는 시퍼런 생

쇠울음 숨죽여 울던 사연들이 없으랴

 

가물거리는 수평선 침몰될 궁지에도

당당히 간절하게 육박전으로 맞서다가

심지 속 뼈대를 꺼내 이판사판 세운 절벽

 

큰엉에 박아 놓았나, 피륙으로 펼쳐 놓았나

스스로 생을 삼킨 심연 깊은 몸뚱이들이

죄 없이 파도칠 때마다 먹빛으로 멍이 든다

 

흩뿌리는 빗속에서 바닷바람 맞비비다

불현듯 염분에도 식히지 못한 고통처럼

아버지, 더 절절해진 기억들이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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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남원 소재 2km의 해안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