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잔대
♧ 연밥 - 김연미
하늘이 감춰놓은 반고딕체 암호문
그 진본 앞에 놓고도 풀지 못한 울음들이
또 다른 꽃의 풀이를 불쑥불쑥 올리며
질펀해진 날들을 켜켜이 쌓다보면
질펀한 슬픔이 뭉쳐 단단해진 작은 방
환하게 꽃의 뿌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 머체왓에서 - 김영숙
여름날 오이지 같네
손 꼭 잡은 남녀가
잎조차
숨을 참는
반백의 소롱콧길
서로의
발소리 들으며
길을 가네
한 그루
나무.
♧ 이어도는 세일 중 - 김정숙
저기, 저 꽃밭 좀 봐
곳곳이 금맥이래
연삼일 비 내리며 그려 놓은 바코드에
빨간불 깜박거리며 섬이 몸살 중이다.
바다로 떠오른 해
바다로 질 때까지
삼시 세끼 밥술이나 뜨며 산다는 요즈음
이상향,
그 땅이 여길까
풀꽃들은 터지고.
날마다 새 주인 섬기는
제주 꽃이 바쁘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아무나 쫓아가는 땅
내일은 어딜 내 놓을까
삶을 거래 중이다.
♧ 무빙위크 - 김진숙
이대로 당신은 나에게서 내릴 수 없다
걷다가 다시 뛰다 출구 찾는 어깨 너머
저만치 앞선 꽃들도 끝장나는 길이다.
누군들 등 떠밀려 살아온 날 없겠는가
발랄한 여행가방에 귀걸이를 단 분꽃들
세상에 발자국 하나 까맣게 찍고 간다.
♧ 꽃불 - 장영춘
누가 긴급하게 소방차를 불렀나
한라산 선작지왓 벌겋게 타는 철쭉
온종일 끄지 못하네 내 그리움의 방화범
♧ 호박네 식구 - 한희정
씨앗 한 알 심었더니
초록 우산 들고 온 식구
나눠 마신 물 반 컵에도 감지덕지 떡잎을 펴며
며칠 밤
두고 본 사이
한 매듭을 올린다
공한지 땅값조차
수직 상승한다는 요즘
과수원 돌담 위를 더듬더듬 거리더니
봉긋한
애호박 덩이가
출산일을 알린다
♧ 큰엉* 앞에서 - 홍경희
어느 아비인들 구멍 하나 없으랴
바람이 잔잔해도 파도치는 시퍼런 생
쇠울음 숨죽여 울던 사연들이 없으랴
가물거리는 수평선 침몰될 궁지에도
당당히 간절하게 육박전으로 맞서다가
심지 속 뼈대를 꺼내 이판사판 세운 절벽
큰엉에 박아 놓았나, 피륙으로 펼쳐 놓았나
스스로 생을 삼킨 심연 깊은 몸뚱이들이
죄 없이 파도칠 때마다 먹빛으로 멍이 든다
흩뿌리는 빗속에서 바닷바람 맞비비다
불현듯 염분에도 식히지 못한 고통처럼
아버지, 더 절절해진 기억들이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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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남원 소재 2km의 해안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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