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도로, 단풍
저무는 하늘 기대어
나도 한번 타고 싶다
5.16도로에선
단풍도 떼로 탄다
물 건너 못 보낸 안부
흔들리는 저기 저 손
한때는 주먹으로
세상 중심에 섰던
오래된 곡괭이 소리
길 하나를 내고 있다
하늘은 눈 질근 감고
목들은 척
돌아섰다
♧ 첫발
첫 발짝을 떼는 것은 한 우주를 여는 것
넘어지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지
아가야 세상의 중심은 흔들리며 가는 거야
♧ 빈집
집 한 채가 없다고
가난한 게 아니다
세상 눈치 볼 것 없다
지푸라기 하나 물고
망치질 못질도 없이
그 의지의
집을 짓던,
뇌성 치던 그날 밤도
우듬지 끝에 걸어놓고
노란 부리 식솔들
총총히 떠난 둥지
어미 새 출석부 부르듯
목이 쉰
나뭇가지
진자리 마른자리
알껍질 부스러기
물 건너 어디로 갔나
노란, 그저 노란, 가을 볕
저문 날 빈집 하나를
허기처럼
품고 있다
♧ 깍지의 노래
한때 꽃 한 송이 내 앞에서 파르르 떨며
그 꽃을 사랑이라, 사랑이라 말한 적 있었네
섧도록 노란 가을이
깍지 끼고 앉아서
황사에 물든 수묵담채 기억 속에
가물가물 떠오르는 내 생의 가벼움이여
다 가고 흔적만 남은
자귀나무 저 열매
반쯤은 그늘이고 반쯤은 양지였을
지난여름 그 꿈마저 다 내려놓은 그곳
부려둔 배낭 하나가
자꾸 길을 뜨자 하네
♧ 단풍 들고 싶은 계절의 시
점박이 노루 등 타고
영실로 내려온 가을
자폐증 앓던 산이 그 오랜 말문을 열고
가을볕 노랗게 내린 돌계단을 쓸고 있다
시대의 파수꾼으로
한 빛깔을 지니고 살던
등 굽은 적송들도 단풍 들고 싶었는지
누렇게 절망을 두른 곁가지를 내민다
바람도 깃을 접는
순환의 소롯길에
아직도 물들지 못한 아픔의 미립자들
어제 그 산 중의 가을이 내 창에 와 물든다
♧ 물들다
너에게 가는 길은 구름 한 점 없었다
통통 여문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손 내밀면
물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 바람결에 스친다
여기일까 저기일까 마음 먼저 앞지르고
마침내 첫눈을 맞춘 청순함의 꽃이여
파르르 첫사랑의 떨림 진동으로 퍼진다
뜨겁던 지열 속 솟아나는 열망들을
산과 산 정기를 받고 풋풋하게 피었구나
들판에 시 한 구절을 낭랑하게 읊었구나
그 누구의 마음 한번 적신 적 없는 나는
향기 한번 제대로 낸 적 없는 나는
해종일 코를 박고 앉아 내 안의 나를 본다
* 장영춘 시선집 '노란, 그저 노란'(고요아침, 2016.)에서
사진 : 한라산 용진각의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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