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장영춘 시선집 '노란, 그저 노란'의 가을

김창집 2016. 10. 31. 23:44


5.16도로, 단풍

 

저무는 하늘 기대어

나도 한번 타고 싶다

 

5.16도로에선

단풍도 떼로 탄다

 

물 건너 못 보낸 안부

흔들리는 저기 저 손

 

한때는 주먹으로

세상 중심에 섰던

 

오래된 곡괭이 소리

길 하나를 내고 있다

 

하늘은 눈 질근 감고

목들은 척

돌아섰다

     

 

첫발

 

첫 발짝을 떼는 것은 한 우주를 여는 것

 

넘어지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지

 

아가야 세상의 중심은 흔들리며 가는 거야

     

 

 

빈집

 

집 한 채가 없다고

가난한 게 아니다

세상 눈치 볼 것 없다

지푸라기 하나 물고

망치질 못질도 없이

그 의지의

집을 짓던,

 

뇌성 치던 그날 밤도

우듬지 끝에 걸어놓고

노란 부리 식솔들

총총히 떠난 둥지

어미 새 출석부 부르듯

목이 쉰

나뭇가지

 

진자리 마른자리

알껍질 부스러기

물 건너 어디로 갔나

노란, 그저 노란, 가을 볕

저문 날 빈집 하나를

허기처럼

품고 있다

   

 

 

깍지의 노래


한때 꽃 한 송이 내 앞에서 파르르 떨며

그 꽃을 사랑이라, 사랑이라 말한 적 있었네

섧도록 노란 가을이

깍지 끼고 앉아서


황사에 물든 수묵담채 기억 속에

가물가물 떠오르는 내 생의 가벼움이여

다 가고 흔적만 남은

자귀나무 저 열매


반쯤은 그늘이고 반쯤은 양지였을

지난여름 그 꿈마저 다 내려놓은 그곳

부려둔 배낭 하나가

자꾸 길을 뜨자 하네

     

 

단풍 들고 싶은 계절의 시

 

점박이 노루 등 타고

영실로 내려온 가을

자폐증 앓던 산이 그 오랜 말문을 열고

가을볕 노랗게 내린 돌계단을 쓸고 있다

 

시대의 파수꾼으로

한 빛깔을 지니고 살던

등 굽은 적송들도 단풍 들고 싶었는지

누렇게 절망을 두른 곁가지를 내민다

 

바람도 깃을 접는

순환의 소롯길에

아직도 물들지 못한 아픔의 미립자들

어제 그 산 중의 가을이 내 창에 와 물든다

     

 

물들다


너에게 가는 길은 구름 한 점 없었다

통통 여문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손 내밀면

물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 바람결에 스친다


여기일까 저기일까 마음 먼저 앞지르고

마침내 첫눈을 맞춘 청순함의 꽃이여

파르르 첫사랑의 떨림 진동으로 퍼진다

 

뜨겁던 지열 속 솟아나는 열망들을

산과 산 정기를 받고 풋풋하게 피었구나

들판에 시 한 구절을 낭랑하게 읊었구나


그 누구의 마음 한번 적신 적 없는 나는

향기 한번 제대로 낸 적 없는 나는

해종일 코를 박고 앉아 내 안의 나를 본다



* 장영춘 시선집 '노란, 그저 노란'(고요아침, 2016.)에서

    사진 : 한라산 용진각의 가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