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군칠 시인을 추억하며

김창집 2016. 11. 22. 10:11


책장을 정리하다가

정군칠 시인의 첫 시집 수목한계선이 손에 잡혔다.

첫 장 사인 말미에 ‘2003. 10. 9.’이란 글씨가 생생한데,

나는 그동안 그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갑자기 세상을 뜬 지도

벌써 4년이 흘렀다.

시집 표지에 고통과 극기, 그 상처들이라 덧붙였듯이

시 속에 그 상처로 인한 아픔이 곳곳에 스며있다.

 

뒤표지에 나온 정호승 시인이 말처럼

제주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며

푸른 수평선 위로 홀로 울며 걸어가는

한 시인의 간절한 뒷모습을 본다.’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읽어 본다.




방어의 잠


꿈틀대는 방어의 살을 발라내자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뼈들

파도의 행간처럼

아득히 먼 길을 본다

물굽이 굽이를 넘어온

저 척추를 받친 빗금들이

지느러미를 움직이던 힘이었을까

살이 토막날수록 온기를 빼앗기며

더욱 선명해지는 갑골문자

적조에 시달리던 바다를 품어 알을 슬던 내장이

번쩍이는 칼날 아래

갈매기의 근육진 그림자를 토해낸다

입덧하는 여자처럼

난도질당한 속을 게워낸다

방어放語

 

  


가문동 편지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 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없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무릎 꿇은 나무

 

모슬포 바닷가, 검은 모래밭.

 

서쪽으로 몸 기운 소나무들이 있다

 

매서운 바람과 센 물살에도 속수무책인 나무들

 

오금 저리는 앉은뱅이의 을 견딘다

 

저 록키 산맥의 수목한계선

 

생존을 위해 무릎 꿇은 나무들도

 

혹한이 스며든 관절의 마디들을 다스린다

 

곧 튕겨져 나갈 것처럼 한쪽으로 당겨진 나이테의 시간들이

 

공명이 가장 깊은 바이올린으로 다시 태어난다

 

곧게 자라지 못하는 나무들의 뼈,

 

그 휜 뼈의 깊은 폼이

 

세상의 죄스러운 것들을 더욱 죄스럽게 한다

    

 

저기 본다

    -제주억새

 

후벼진 가슴이 다 메워질 순 없다

바람에 쓸리며 말아 쥔 허공

겹겹 이불을 덮고도 신음 중이다. 산은

 

사월이 옹이처럼 각인된 이 섬에선

무한천공 빗금 긋는 내 사랑도

등짝 후려친 자죽으로 남아

드러나지 않는 시퍼런 슬픔이

오래도록 웅크려 있다

 

다시 말하면

야생으로 냉동 처리된

적멸 같은 것

    

 

빈 의자, 흔들리고

 

산이수동 방파제

섬이 의자 하나를 내어놓네

아무런 뜻 없이 내어놓네

어디서 고개 꺾는 법을 배웠는지

물결들, 무덤이 흔들리네

송악산 허리 컴컴한 암굴 속에선

자리를 고쳐 앉는 이의 헛기침 소리 들리네

아주 간간히 들려오네

재갈 물린 검은 바위의 상처를 품에 안은

새 한 마리, 날개 젖은 채 날아가네

검은 바위 자갈자갈 울먹이네

빈 의자, 가만히 귀 기울이네

     

 

저기 본다

     -흉터

 

   봉사료가 붙은 우거지탕을 시키자 식탁 위로 배고픈 바다가 달겨든다. 이름이 우습다 어, 빌리지씨 빌려? 우거지상으로 일그러진 친구의 얼굴이 불 지필 아궁이도 없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고향은 학적부처럼 늘 마음 그늘진 곳에 숨었다가 눈독 들인 바람에 들키는 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휘파람 불며 달려온다.

 

   맨발이 외려 편안하던 바다의 등, 어린 날 빠뜨린 깜장 고무신 두 짝이 폐선으로 떠오른 포구에 어디서 보았더라, 마음의 성채처럼 우뚝 선 당산나무, 가지 위, 허공을 물어다 그물 깁는 잎새더러 어긋나기 시작한 세상은 짜집을 수 없더란 말, 새순 틔운 가지더러 한자리 차지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더란 말, 바람에 가지 휘는 마음이 사실은 뿌리 향해 몸 기울기더라는 말.

 

   기억, 끝내 빠져나가지 못하는 모래알 몇 개가 소주잔을 채울 때, 빈 집의 옆구리를 돌아 나온 바람이 아군을 만난 듯 손을 내밀어 우리는 우거지탕의 국물보다 더 텁텁한 굴욕을 삼킨다. 아직 우리의 음모는 들키지 않았지. 단단히 묶인 띠지붕을 훤히 밝히는 유치乳齒의 번쩍거림 속에 아이들의 웃음소리 들려온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열자 등을 칼로 배인 주민등록증이 먼저 튀어 나왔다. 거기 아리던, 아리던아물리지 않은 상처들

 

  

*정군칠 신작시집 수목한계선’(한국문연, 2003.)에서

     사진 : 묵은 사진첩 속 제주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