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개
새가 살았을 때는
바람을 품어 허공을 날더니만
새가 죽었을 때는
바람이 불어와 몸을 흔들어도
허공을 알지 못한다
♧ 그냥
어떤 생각도 하기 싫어서
얼마가 되는지 모를
길을
마냥 걸었다
뒤따르는 것은
오직
나의 그림자뿐
♧ 그림자 ㆍ1
숨을 쉬는 것들에게는
극한의 고통이 하나씩 있어
혼자임을 잊게 할
극진한
나의 내가 있어야 했다
신도
외로움에 지쳐 자신을 닮은
사람을 만들었다지 않은가
사람이었기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천형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지상의 모든 별들에게
밤과 낮을 더불어
삶을 넘어 죽음의 순간까지도
악착같이 나를 지켜줄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나의 그대
♧ 독백
미친 영혼들의
적막한 노래
멍석 한 장 없이
읊조리는
모노배우의 탄식
술자리에서
내뱉는
허튼소리만도
못한 것
자신도 모르고
자신도 헷갈리는
생각 없이 내뱉는
한숨
그보다 못한
시인들의 곡조 없는
중얼거림
♧ 산수국
한라산 둘레 깊은 길섶에
푸른 산수국은 안개비에 젖어도
바람에 흔들린다
잘디잘게 부서진 꽃잎만으로는
애처로운 사연 다 전할 수 없어
제 마음 아닌 마음을
덧대어 붙이고
사는 게 다 그렇지
어찌 다 보여주며 살아졌던가
부서지고 멍든 가슴은
헛꽃 몇 장 밑에 숨겨두고
헤살헤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잔바람에도 파르르 떨리는
헛꽃이 되어
푸른 심장이 되어
♧ 압화
누구의 상상이었던가
물관 속에 흐르던 투명한 사랑을
섬뜩하게 잘라 비끄러맨
멈춤
멈춰진 시간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너
그러니까 이생에서 단 하나
너의 가슴에서 지지 않는
꽃이고 싶다
그대 앞에서
바스러져버리는 먼지가 될망정
잊히지 않는
그대의 사랑이고 싶다
♧ 옹이
너에게 있어 가장 단단한 심장이고 싶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가장 맑은 한 점
너에게로 향하던 고집스런 마음의 길
♧ 산자고
나른한 현기증이 몸속을 파고들어
울렁이는 봄날
죽은 자의 반듯한 이마 위에서
하늘하늘한 빛을 온 몸에 받아들고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춤사위로
다시 생명을 피워 올리는
그대는
살아야했음으로 죄가 필요했던
지상의 모든 어리석은 삶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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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시집 ‘물들다’(리토피아, 2016)에서
사진 : 지난 12일 광령천 계곡에서 본 가을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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