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에서 산다는 것은
-관계(關係)ㆍ9
바다가 달려온다. 하이얀 맨발로 달려온다.
섬에서 산다는 것은 어디든지 따라나서는 그녀를 떼는 일. 촐랑대는 바다를 허리에 두르고 시도 때도 없이 비린내 풍기는 그녈 떼 놓는 일. 해해거리며 속살대며 비린 내 솔솔 풍기는 그녈 떼 놓는 일.
섬에서 산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비린내를 씻어내는 일. 씻어도 씻어도 씻을 수 없는 비린내를 안고 뒹구는 일. 비릿한 자궁 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은갈치떼를 기다리는 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빈 낚시에 걸린
그리움을 낚는 일.
두 손 가득 넘치는 그리움의 무게를 견디는 일. 달빛 속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그리움의 속살을 벗갈까 말까 망설이는 일. 그러다가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일.
바다가 달려온다. 하이얀 맨발로 달려온다.
♧ 겨울이 있는 풍경
-관계(關係)ㆍ10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산에도 들에도 내안의 뜨락에도 소복이 내렸습니다.
길도 집도 나무들도 심지어 작은 돌멩이까지도 어제의 그것들이 아닙니다.
와! 불꽃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너와 나의 가슴 속에서 펑 펑 터지는 불꽃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지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눈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풍경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지요.
어떤 놈은 머리통이 박살나고, 어떤 놈은 허리가 부러지고, 또 어떤 놈은 관절이 꺾인 채 그 자리에 풀썩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파릇파릇 봄빛을 틔우던 봄의 정령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요.
오늘도 눈이 내립니다. 산에도 들에도 내안의 뜨락에도 소복소복 내립니다.
4월인데도 소복이 쌓인 눈, 풍경들이 놀라 냉큼 뒤로 물러섭니다.
♧ 눈물보다 더 슬픈
-동백ㆍ3
모슬포 토담집 마당 한 구석, 눈 위에 동백꽃이 곱게 피어 있네. 동지섣달 긴긴 밤 문풍지 소리에 허벅지 꼬집던 젊은 과수댁, 꽃샘바람에 덜컥 마음 내주고는
눈 위에 누워 생글생글 웃는
붉디붉은 저 울음,
한 잎 한 잎 조용히 지고 있네.
♧ 안개 속의 방
안개를 만나다. 길을 헤매다가 우연히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다. 크고 작은 나무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그녀의 방. 한 줄기 바람에도 간당간당 흔들리는, 허공 속의 작고 초라한,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알싸한 바다 냄새, 어슴프레한 어둠이 발목을 적시는, 언젠가 한 번 와본 듯한 그
방, 동그만 창 너머로 보이는 동그만 바다와
안개꽃 다발이 놓인 동그만 의자 하나
하이얀 꽃잎 사이로 파도가 밀려오다.
원을 그리며 자꾸자꾸 밀려오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의자와
하이얀 꽃잎들…
와르르 아성이 무너지다.
뇌수 속의 시계가 뚜욱 멈춰서다.
안개가 걷히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야 하는데,
내 안에서 멈춰버린 시계는 어찌해야하나
내 안에 가득한 이 안개는 어찌해야하나
♧ 의자와 구름
의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찔레꽃 향기가 말을 걸어왔다
흐드러진 넝쿨꽃이 큼직큼직 떨어지는 문장 속의 들길에 동그만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허름한 의자 하나가.
공교롭게 길은 의자와 꽃잎 사이를 관통하고 있다. 갑자기 길들이 하늘로 솟구치는가 하면 땅 속으로 꺼지고, 서로 엉켜 하나가 되는가 하면 둘이 되고.
나는 길의 소용돌이 아래 납작 엎드려 있다가, 대가리를 쳐들고 낼름거리는 독 오른 꽃뱀이 되어 하늘로 오르다가, 바람 난 세상과 함께 에스파냐 탱고를 추는 근육질 사내를 바라보다가
의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찔레꽃 향기가 말을 걸어왔다.
* 진진 시집 '하이얀 슬픔을 방목하다'(한국아카이브, 황금느티나무시인선. 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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