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겨울호 시조와 자금우

김창집 2017. 1. 2. 12:43


어제는 해돋이 안 가고 평소처럼 산행했다.

쫄븐 갑마장길을 걷기 위해 조랑말공원에 차를 세우고

따라비와 큰사슴이오름까지 올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 의외로 많아

지난날 오르던 오름 얘기하며 지칠 새가 없이

약 12km 정도 되는 길을 후딱 걸었다.

 

이제는 관광객 취향이 다양해져서

갑마장 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모르는 것들을 서슴없이 묻는다.         


아침에 '제주작가' 겨울호에 실린 시조를 읽다가

한 분 한 작품씩 옮겨

어제 찍은 자금우 사진과 같이 올린다.

   

 

 

비닐을 내리다 - 김연미      

      

속 깊이 들여다봐도 늘 흐릿한 삶의 안쪽

눈빛 선한 열매들이

계절의 길을 묻는

과수원 비닐하우스 묵은 옷을 벗는다

 

벼랑처럼 잘려진 의무의 줄 끝점에서

비로소 몸을 펴는

먼지 낀 지문들

고였던 울음 한 쪽이 울컥 쏟아져 내리고

 

어느 마음엔들 투명한곳 없었으리

바람이 습을 하는

빈 몸의 어깨 한쪽

시간의 아래쪽으로 가을처럼 기운다.

   

 

 

달과 호박 - 김정숙

 

점점 둥근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속 30킬로로 초등학교 앞을 지나고

 

그 후론 쓰러진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한 겹씩 찢겨 나간 머리맡 붉은 달이

 

주름진 과거를 품고 씰룩씰룩 자랐다

 

누렇게 익은 달덩이 가을밤을 밝힌다.

   

 

 

푸른 상영관 - 김진숙

 

가난한 이웃나라손톱 밑을 빠져나온

연분홍 껍질 같은 어린 봄이 위독해서

나무는 잎보다 먼저 저리 꽃 피우나.

 

한 평 반 고시텔 웅크린 방에 담겨

떠돌이 잔별들이 써내려간 결심처럼

이력서 모로 누워도 불을 끄지 못하고,

 

몸으로 말하는 것이 어디 그 뿐이랴

저마다 감추고 온 휘어진 날에 대하여

꽃지자 서둘러 내민 푸른 손이 아리다.

   

   

우포늪 - 오영호

 

숨기고 싶은 일들이 누군들 없겠냐만

 

너는 안개장막에 깜깜했던 천지(天地)처럼

 

하늘 문 꽉 닫아걸고

 

깊은 잠에 들었나보다

 

파수꾼 왜가리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바람의 손을 잡고 비행을 시작하자

 

서서히 걷어 올리는

 

70만 평 치맛자락

 

생명의 초록 나라 눈뜬 피라미들

 

수초와 수초 사이 새로운 길을 내며

 

여기는 살만하다고

 

숨길 것도 없다고

 

바람의 등을 타고 온종일 나르고 있는

 

물무늬에 반짝이는 태곳적 혼의 말씀에

 

우울한 내 마음의 뜰에도

 

가시연꽃 피고 있다

   

 

 

다시 가을 - 장영춘

 

별짓을 다 해봤자

시 한 줄 없는 가을

우연한 발길 따라 서영아리오름에 앉아

물 위에 뭉게구름만 다독이고 왔었다

 

깊이 한번 빠져봐야,

그게 진정 사랑인 거

소금쟁이 딛고 간 물에 서푼어치 사랑만

한 번도 젖지 못하고 물수제비로 떠돈다

 

단풍나무 따라가다, 왔던 길도 놓쳤다

아예 분화구에 터를 잡은 세모고랭이처럼

서울에 뿌리를 내린

딸의 안부나 묻는 가을

   

 

 

문경새재 - 한희정

 

산 붉어

물도 붉어

발자국 따라 붉네

오지랖 넓은 중년의 감탄사가 더 붉은,

비 젖은

단풍잎들이

콕 짝하는 황톳길

 

행여 저 상형문자 어느 선비의 자취인가

꼬불꼬불

산길 닮은 오장육부 쓰라렸을,

꿈같은

금의환향의

낙향길이 젖어드네

 

 

 

11- 홍경희

 

가다 말다 멈칫멈칫 돌아보거나 말거나

사소한 바람에도 가랑잎을 털어내고

막바지 미간 찌푸린 쓸쓸함만 남은 지금

 

곁을 내어주던 마음까지 거둬들여

빈 가지 채워놓고 덤덤히 돌아설 때

슬픔도 헐거워진다,

눈물 없이 외따로

 

고작 짧은 두 줄 문장에도 겨운 이별

정말로 끝이 날까, 소실점에 다다르면

목청껏 직박구리만

절박하게 울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