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해돋이 안 가고 평소처럼 산행했다.
쫄븐 갑마장길을 걷기 위해 조랑말공원에 차를 세우고
따라비와 큰사슴이오름까지 올랐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 의외로 많아
지난날 오르던 오름 얘기하며 지칠 새가 없이
약 12km 정도 되는 길을 후딱 걸었다.
이제는 관광객 취향이 다양해져서
갑마장 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모르는 것들을 서슴없이 묻는다.
아침에 '제주작가' 겨울호에 실린 시조를 읽다가
한 분 한 작품씩 옮겨
어제 찍은 자금우 사진과 같이 올린다.
♧ 비닐을 내리다 - 김연미
속 깊이 들여다봐도 늘 흐릿한 삶의 안쪽
눈빛 선한 열매들이
계절의 길을 묻는
과수원 비닐하우스 묵은 옷을 벗는다
벼랑처럼 잘려진 의무의 줄 끝점에서
비로소 몸을 펴는
먼지 낀 지문들
고였던 울음 한 쪽이 울컥 쏟아져 내리고
어느 마음엔들 투명한곳 없었으리
바람이 습을 하는
빈 몸의 어깨 한쪽
시간의 아래쪽으로 가을처럼 기운다.
♧ 달과 호박 - 김정숙
점점 둥근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속 30킬로로 초등학교 앞을 지나고
그 후론 쓰러진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한 겹씩 찢겨 나간 머리맡 붉은 달이
주름진 과거를 품고 씰룩씰룩 자랐다
누렇게 익은 달덩이 가을밤을 밝힌다.
♧ 푸른 상영관 - 김진숙
가난한 이웃나라손톱 밑을 빠져나온
연분홍 껍질 같은 어린 봄이 위독해서
나무는 잎보다 먼저 저리 꽃 피우나.
한 평 반 고시텔 웅크린 방에 담겨
떠돌이 잔별들이 써내려간 결심처럼
이력서 모로 누워도 불을 끄지 못하고,
몸으로 말하는 것이 어디 그 뿐이랴
저마다 감추고 온 휘어진 날에 대하여
꽃지자 서둘러 내민 푸른 손이 아리다.
♧ 우포늪 - 오영호
숨기고 싶은 일들이 누군들 없겠냐만
너는 안개장막에 깜깜했던 천지(天地)처럼
하늘 문 꽉 닫아걸고
깊은 잠에 들었나보다
파수꾼 왜가리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바람의 손을 잡고 비행을 시작하자
서서히 걷어 올리는
70만 평 치맛자락
생명의 초록 나라 눈뜬 피라미들
수초와 수초 사이 새로운 길을 내며
여기는 살만하다고
숨길 것도 없다고
바람의 등을 타고 온종일 나르고 있는
물무늬에 반짝이는 태곳적 혼의 말씀에
우울한 내 마음의 뜰에도
가시연꽃 피고 있다
♧ 다시 가을 - 장영춘
별짓을 다 해봤자
시 한 줄 없는 가을
우연한 발길 따라 서영아리오름에 앉아
물 위에 뭉게구름만 다독이고 왔었다
깊이 한번 빠져봐야,
그게 진정 사랑인 거
소금쟁이 딛고 간 물에 서푼어치 사랑만
한 번도 젖지 못하고 물수제비로 떠돈다
단풍나무 따라가다, 왔던 길도 놓쳤다
아예 분화구에 터를 잡은 세모고랭이처럼
서울에 뿌리를 내린
딸의 안부나 묻는 가을
♧ 문경새재 - 한희정
산 붉어
물도 붉어
발자국 따라 붉네
오지랖 넓은 중년의 감탄사가 더 붉은,
비 젖은
단풍잎들이
콕 짝하는 황톳길
행여 저 상형문자 어느 선비의 자취인가
꼬불꼬불
산길 닮은 오장육부 쓰라렸을,
꿈같은
금의환향의
낙향길이 젖어드네
♧ 11월 - 홍경희
가다 말다 멈칫멈칫 돌아보거나 말거나
사소한 바람에도 가랑잎을 털어내고
막바지 미간 찌푸린 쓸쓸함만 남은 지금
곁을 내어주던 마음까지 거둬들여
빈 가지 채워놓고 덤덤히 돌아설 때
슬픔도 헐거워진다,
눈물 없이 외따로
고작 짧은 두 줄 문장에도 겨운 이별
정말로 끝이 날까, 소실점에 다다르면
목청껏 직박구리만
절박하게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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