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3월호의 시와 백목련

김창집 2017. 3. 16. 08:51



먹꽃 - 임보

 

유화를 그린 친구의 화실에 갔더니

붓이 갔던 자리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위에 다시 그리고

그래도 마음에 안 차면 그 위에 또다시 칠하고

덕지덕지 물감에 물감을 칠해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시를 쓰는 시인도 마찬가지다

골라잡은 말이 마음에 못 미치면 다른 놈으로 바꾸고

그래도 흡족치 않으면 또 다른 놈으로 바꾸고

한 편의 시가 수많은 퇴고로 너덜너덜 얼룩진 상처다

 

요즘 음악을 만드는 과정도 또한 그렇다

한 곡의 노래를 수백 번 반복하여 녹음한 다음

최선의 부분들만을 골라 짜깁기 해

한 장의 음반으로 만들어낸다지 않던가?

 

그런데, 옛 선비들의 글씨나 문인화는 어떠했던가?

번 지나간 자리에 붓이 다시 가지 않았다

일필휘지(一筆揮之) 칼처럼 서늘한 문기(文氣)!

눈밭보다 하얀 화선지에 먹꽃이 피었다!

   

 

- 정순영

 

내 슬픔이 데리고 다닌 것은 비였네.

 

바람 시린 생애를

때론 가랑비가

때론 이슬비가

때론 소낙비가 달래 주었네.

 

비가

달래지 못한 슬픔은

으로 남아

질긴 그림자로 흐느끼네.

 

내 삶을 적신 것은 슬픔이었네.

     

 

 

은행나무 아래 지진 - 전인식

 

일부러 해가 지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누가 먼저 가자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갔거나

고양이의 후각으로 비릿한 무엇인가의 냄새를 맡았거나

아니면 구름 속 숨은 낮달이 우리를 유인했는지 모릅니다

 

도시 끝자락에 있는 작은 공원엘 갔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이 서성거리다가

어쩌다 마주하는 눈빛이 어색해질 때

붉어지는 서쪽 하늘 힐껏힐껏 훔쳐보다가

서로의 가슴에 숨어 있는 수심의 깊이를 재어보다가

먼 훗날을 가늠해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하늘 한쪽 모서리에 은행잎 노란색으로 서로를 칠하다가

두 사람이 또 다른 한그루 은행나무로 섰을 때

갑자기 우르르 쿵쿵 땅이 흔들렸습니다

아찔한 현기증과 동시에 온 몸이 흔들렸습니다

다행이 서로를 껴안고 있었기에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태어나서 처음 하는 키스라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지진이라 했습니다

나중 이십년쯤 지나갈 무렵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느낀 오르가즘이라 했습니다

     

 

호박고구마 - 정병성

 

우리 평생 넝쿨 이름 가져 본 적 있느냐

 

한여름 한 흙더미 나무 토막처럼 파묻혀 샛노란 가슴

 

그 가슴 알맹이 넝쿨넝쿨 살아 본적 있느냐

 

한 화롯가 너 나 우리 심장 저 깊은 달 속으로 뒤엉켜

 

달달한 양식되어 본 적 있느냐

   

 

 

부채 - 박정순

 

마음의 빚이다

그 부채 갚으려다

더 큰 빚으로 늘어난

숫자로 확인할 수 없는

무량의 마음

오종종

작은 마음

봉투에 담아

전하니

결단코 되돌려주는

그녀의 깊고 넓은 생각에

내 손이 간지럽다

     

 

유리문 사이에 두고 - 신단향

 

새 달력을 벽에 건다.

헌 달력이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인다.

수많은 날짜들이 지워져 가고

광채를 발산하며 새 날들이 다가온다.

대지 위에 꼬물거리는 개미들처럼

일상들이 산란되고 있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맞대며

얼굴을 바라보는 연인들,

목소리는 아련한 저편에서 들려오고

맞댄 손과 손으로나마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투명한 빛으로 연결된 시간의 흐름을 투시한다.

새 달력과 헌 달력 사이엔 한밤의 타종 소리가 끼워져 있다.

서로를 부르다 핏발선 눈이

결코, 깨어지지 않는 강화 유리를 긁는다

     

 

부채 - 박정순


마음의 빚이다

그 부채 갚으려다

더 큰 빚으로 늘어난

숫자로 확인할 수 없는

무량의 마음

오종종

작은 마음

봉투에 담아

전하니

결단코 되돌려주는

그녀의 깊고 넓은 생각에

내 손이 간지럽다

녹음 짙은 팔월

내가 갚지 못한 부채

그대 하늘로부터

우수수 축복 받을 일이다

     

 

- 장정순

 

바다가 산 위에 올라 달을 삼켰다

산이 바다에 내려가 달을 토했다

본시 둥근 달이 빛을 잃자

바다는 까맣게 몰락하고

조개가 검은 진주를 토해

달 대신 바다에 걸었다

달은 여전히 둥글지만 아무도

검은 진주를 달로 여기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빛나지 않는 것은 삭은 것이라고

 

달은 바다 밑 대륙붕에도 떠서

검푸른 바다의 전설을 캐고 있다가

달마다 은밀히 여자를 찾아와

생명의 빛을 뿌리고 간다

빛 속에서 나온 바다벌레가

여자의 몸속에서 자라나고

벌레의 꼬리에서는 숲이 태어난다

매월 초하루 산에 오르는 저 까만 달은

여자의 바다에서 태어났다

 

여자는 달의 기운으로 바다를 품고

생명의 바다에서는 창조가 이어진다

기울어 까만 달은 삭은 것이 아니라

채울 날을 위해 잠시 비운 것

바다에서 떠오를 준비를 마치면

서서히 태양을 향해 나아가

온몸 가득 빛으로 채우고

드디어 온 누리의 밤 신이 된다

 

여자의 몸은 바다였다가 달이었다가

종국에는 대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