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잠시 가게로 가는 길
소공원을 지나는데,
하얀 꽃잎이 포장도로에 널렸다.
그렇다면 벌써?
하고 고개를 드니,
거짓말처럼 벌써 때죽나무 꽃이 피었다.
'종처럼 매달려 꽃피고 열매 맺는다' 하여
제주에서는 ‘종낭’이라 한다.
아직도 봄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내게
봄날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 때죽나무꽃 - 이광석
온갖 봄꽃 다 진 자리에
밥풀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때죽나무꽃
외할머니는 저 희디흰 꽃잎으로
하이얀 쌀밥을 지어 내셨다
새들이 휘파람으로 불러모은
5월의 푸른 들판에
거짓말처럼 내린
설화雪花
외할머니 옥양목 치맛자락
때죽나무 가지마다
눈부시다
♧ 때죽나무꽃 - 안재동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
때죽나무에 활짝 핀 무수한 하이얀 꽃들이
그 순백의 꽃들이 하나같이
땅바닥만 바라보며 웃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을 한 점이라도 더 받으려는 양
어쩌면 세상에서 제멋만이 최고인 양
그도 아니면
푸른 하늘에 앞다투어 얼싸 안기려는 양
가지가지 색깔과 양태로 요란하게 분단장한
세상의 여느 꽃들과는 딴판이다
때죽나무꽃에 그 연유를 물었더니
단 한 순간도 땅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로등에 물어보라고만 한다
때죽나무꽃의 주문을 헤아리려
땅거미가 온 거리를 삼킨 뒤의 저녁 무렵
가로등에 바짝 다가섰으나
고개를 쳐들고 바라만 보고 섰다가 조용히
돌아서고 말았다
그렇게, 사람은 가로등을 만들지만
고장 나기 전까진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산다
어쩌면 때죽나무꽃과 가로등의 심정으로
지금 나를 바라보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가끔
땅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 즐거울 때 있다
세상 모든 꽃들이 하늘만 바라보는데
때죽나무꽃이 아니라면
어느 꽃이 맨땅에 눈길 한번 줄 것인가
제 얼굴의 아름다움도
땅에 의지하고 있는 제 뿌리 때문임을
꽃들은 알기나 할까?
땅은 때죽나무꽃더러 이른다
세상 그 어느 꽃보다 수더분한 이름이여
그 어느 꽃도 비할 수 없는 참빛의 얼굴이여
갈수기의 단비처럼 고마운 존재여
순박의 사랑이여
♧ 새벽 산빛이 일어 - 박남준
밤산 밤강 밤들 잠든 나무 잠든 집 잠든 새
새벽빛으로 깨어난다.
어둠에 잠긴 풀꽃들 꽃잎 벙그는 소리
애기똥풀을 인동꽃을 때죽나무 그 하얀 꽃잠을
비로소 쇠락한 산길을 풀어 놓는다
맑은 입김에 피워 올리는 개울
푸른 새벽이 풀어놓은 산길
나 밤새 이슬을 헤치며 칠흑 산 속 헤매었는데
바람 거센 산 위에 올라
우우 짐승의 울음으로 목이 메었는데
♧ 비밀 - 이길원
이건 아내도 모르는 일이야. 내가 이른 새벽 용왕산에 오르는 이유를. 운동 삼아 가는 줄 알지. 하지만 사실은 이야기 묻으려 가는 걸세. 주름지고 처진 살결 양복 속에 감추고 지낸 어제가 아닌가. 아내에게도 차마 할 수 없던 이야기를 아카시아 꽃잎에 얹으려 가지, 가령 말일세. 판사 앞에서 조아리고 싶어 안달이 난 시인들이나 정치인처럼 호령하며 편 가르는 문인들 있지. 시인이라고 안경 걸치듯 내세우는 소리 가만 듣고 있다가 뒤늦게 상수리나무에 대꾸하려 가지. 실성한 사람처럼 말이야. 혹 참았던 눈물이 있다면 때죽나무 잎에 걸어놓고 온다네. 그렇게 이야기를 묻고 오면 시원하단 말이야. 자네도 한번 해보게. 피곤하게 소리치며 남과 싸우지 말고. 누가 그랬지? 이길 것도 질 것도 없는 세상이라고. 시인이 부끄러울 때가 너무 자주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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