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을 따라서 - 전정희
그래,
고흐의 화폭 같은 하늘 위로
찌푸린 구름 잔뜩 몰려들고
바다를 비추는 달의 흔적이 없을지라도
그저,
폭죽 소리 드문드문 밤공기를 차오르고
무시로 틈새를 헤집는
성가신 파도를 견뎌내는 모래알로 설 수 있다면
우리,
어깨를 한껏 곧추 세우고서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듯 그렇게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자.
아직,
잠들지 않은 먼별을 따라.
돌아가지 않은 등대를 따라.
♧ 순천의 달빛
아랫녘*을 향한 그리움으로
순천만을 품에 안은 밤
머리 뉘인 기왓집 수막새로
낙숫물을 세는 외등빛을 따라서면
백로 같던 조부님의 굽은 등이
오도카니 차부* 앞을 지키고 섰다
순천의 달빛이 곁에 누운 밤
사부대는 이불을 여미시던 그 손길도 따라 눕고
는개가 조근조근 피어나는 갯벌 위로
아득한 갈대밭 날갯짓도 잠이 들면
비잉빙 돌던 푸릇한 마음 자락
다독다독 여미어 하이얀 달빛에 씻겨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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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녘 :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쪽 지방을 아우르는 말
*차부 : 버스터미널의 경상도 방언
♧ 오도재를 넘으며
지리산이
풀어낸 하동들로
꽃양귀비 흔들리며 흔들리며
섬진강을 불러들인 날
자박자박
산자락을 밟아 오르면
안개처럼 피어나는
밤꽃향이 반긴다
지리산이 키워낸
어느 시인의 시구가
지친 새벽을 깨우는
오도재의 마당으로
뽀얀 밤꽃이
별빛처럼 날아 내리면
산줄기를 타는 바람소리
오도송이 되고
고향집 일깨우는 묵은 내음이
가문 논에 자박대는 물소리마냥
휘청이는 내 마음에
자욱이 감겨든다
밤꽃향 날리는
유월의 오도재를 넘으며
사진보다 선명하게
그리움을 찍는다
♧ 그대, 문경 새재여
여름이 쉬어 앉은
주흘산 고갯마루
황토빛 과거길에
도라지꽃 남실대고
그대는
시제가 되어 깃발로 나부댄다
햇살이 길어 올린
무성한 새재 위로
푸르게 풀어내는
한바탕 축제 마당
한 계절
모여 앉아서 얼싸안고 흥겹다
노을이 비낀 자리
홍조 띤 문경의 달
늦도록 마주앉은
흔들린 빛 속으로
큰 울림,
재를 넘는다 좋은 소식 듣는다
♧ 장맛비, 단상
들린다.
오랜 슬픔이 토해내는 짙은 울음소리.
어둠에 익숙지 못한 낮 비가 몰고 와
온통 밤거리 여기저기를 쓸어내리는
끝없이 질긴 울음소리 소리들.
어둠도 가리지 못한 깊은 통곡을 들으며
나는 지금 달리는 차창에 붙어 있다.
안다.
하염없이 바라볼 뿐
도무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쏟아내야 하리라.
의식의 깊은 바닥에 드러누워
자꾸 너를 무너뜨리는
기억의 터널 속을 꽉 채운
그 질기고 질긴 이별 뒤의 아픔을.
그 수렁 같은 슬픔을.
모두 다
비워내고서야
그때서야
비로소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음을.
♧ 바위
산허리 피어나는
세월과 벗하며
머언 산 바라보며 버티어 온 날들
가슴엔
이끼가 끼고 눈물조차 산화 됐다
손길 한번 못 닿고서
뿌리 내린 그리움은
맞은편 산허리에 안개비로 흩날리고
오롯이
핀 그리움은 무지개로 걸리었다
주체 못할 목마름에 강물에 몸담아도
못다 비운 마음 아직, 안으로 흔들리어
뜨거운
바람 한 줄기 정수리 뚫고 지나간다.
♧ 별
먼 길을 돌아서
아주 머언 길을 돌아서
이제야,
먼
발
치
나도 타인으로
그대 역시 타인으로 스치네
별이 돋노라
등촉燈燭 스러지는 밤에
-우리詩 2017년 6월호 ‘테마 소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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