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윤승 시집 '눈가에 자주 손이 갔다'

김창집 2017. 6. 15. 13:25



시인의 말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모든 당신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를 나로 살게 하는 오랜 당신들이

더 이상

희미해지지 않도록

 

20175

이윤승

  

  

청매실

 

봄도 여름도 아닌

계절의 한 페이지를 읽다가

 

저렇게 탱글탱글 파랗게 여물기까지

햇살 바람 비 적당량 때문이었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런 내면이나 아픔이나 고뇌 없이

저토록 알알이 푸를 수는 없을 거다

생각하다가

천둥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세상 어미의 마음이 그러하듯

내면을 굳건히 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을 거라고

 

푸릇푸릇 면도 자국이 난 청년이

유월과 교신하고 있다

   

 

 

나에게 묻는다

 

  꽃댕강나무 꽃가지 꺾어

  책상 위에 놓는다

 

  작은 가지에 오종종히 매달린 흰 별사탕 같은 꽃 파랗게 질려 개미 세 마리를 게워낸다 놀라 허둥대며 갈팡질팡하는 개미들, 잘 살라는 당부를 묶어 멀리 내려놓았다 한참 후 책상 위에서 서성이는 개미들, 설마 하며 더 멀리 내려놓고 잊고 있었는데, 한사코 책상 위로 기어오르는 저것들

 

  무엇일까

  저들을 116번 책상 위로 불러들이는 힘은

  꽃댕강나무꽃 마음자리

  저도 모르게 배어 나오는 것은

   

 

 

유혹

 

도서관 가는 길

동광성당 앞에서

꽃댕강나무한테 발목 잡혔다

무슨 나비지?

 

칠월 하순

꽃이고 싶은 내게

꽃댕강이 묻는다

   

 

 

꽃이 피었습니다

 

  아침 티브이 속,

  온갖 어려움을 딛고 소위 일류라는 대학에 수석 합격한 한 청년이 출연했다

 

  “중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멋있게 보이려고 아이들과 어울려 담배도 피워보며 웃어대던 때였지요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공사장 구내식당엘 간 적이 있었는데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식판을 들고 오던 아버지가 그만 식판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공사판에서 한쪽 팔을 다친 적이 있던 아버지, 식당 아주머니 앞에서 쩔쩔매며 어찌할 줄 모르던, 그때 아, 나도 까닥 잘못하면 아버지처럼 저렇게 식판을 놓치고 말겠구나

 

  그는 어린 날

  제 몫의 식판을 생각했다는데

  환경 탓만 하던 내 지난 날 절뚝거리며

  저만큼 걸어가고 있다

 

  오늘 아침

  새의 날갯짓 같은 파닥파닥한 이야기

  압력밥솥의 밥물 끓는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들린다

   

 

 

오월의 편지

 

담장 안 목련 한 그루

잎 틔우기 전,

하얗게 꽃부터 피우더니

어느새 입술 꼭 다문 채 땅으로 젖어들었다

 

그대들의 열망처럼

하얗거나 자줏빛이었거나

꽃으로 환히 피었다 가는 자리

 

초록의 언어 위에

수만 땀 햇살이 비처럼 내린다

 

떠난 꽃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말

손바닥 같은 파란 종이에 적어놓은

소인 없는 파란 문장의 편지를

오늘은 다 읽기로 한다

   

 

 

개미

 

  이른 아침, 어린 햇발이 부르는 소리에 마당으로 나왔다 부지런한 개미들 벌써 마당가에 길을 내며 오가고 있다 제법 분주한 모습이다 제 몸보다 더 큰 먹이를 물고 부지런히 가고 있는 녀석도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한참 동안 물끄러미 개미들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모습 스쳐 지난다 여덟 식구의 가장인 어머니의 허리는 잘록해진 개미의 허리였다 남보다 일찍 모내기를 끝낸 어머니의 머리에는 어느새 생선을 가득 담은 빨간 고무통이 머리에 얹혀 있곤 했다

 

  꽃밭, 종려나무 밑둥치까지 길을 내고 있는 개미들 마당 물청소를 하려고 들었던 고무호스를 나도 모르게 살며시 내려놓았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산다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제서야 알았다

   

 

 

꽃에게 죄를 묻다

 

  어머니 몸에 꽃이 피었다

  뿌리번식을 한다는 꽃

  빼곡하여

  잔명의 최고장이 고지되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어머니를 본 후 간다는 말도 못하고 뒤돌아섰다 가게를 쉴 수 없는 빨간 나의 경고장 몇 시간을 달려 막 가게에 도착했는데 침묵을 깬 다급한 전화벨이 울린다 다시 돌아선 저녁 어스름, 찻길 어깨까지 덮은 허연 안개는 남의 속도 모르고 제 이야기만 끝없이 풀어내고 있었다 항상 머물러 있을 줄만 알았던 어머니,

 

  지금 혼자

  그 강을, 건너고 있다

 

  눈가에 자주 손이 갔다

 

  오므린 분홍 꽃잎 몇 점 천천히

  내려앉았다

 

  다음 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 이윤승 시집 '눈가에 손이 자주 갔다'(문학의 전당 시인선 0269, 2017.)

   * 사진 - 꽃댕강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