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57호의 시와 산딸나무 꽃

김창집 2017. 7. 2. 21:09



아무 것도 아닌 슬픔의 빙과류 - 김신숙

 

안녕? 나는 슬픔의 빙과류라고 해

나무 기둥에 하나씩 꽁꽁 얼려 두었지

내 슬픔은 내 온도에 맞는 냉동고하고만 대화를 해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어, 상하기는 어림없어

그저 녹아 사라질 때까지, 제 고집의 슬픈 단맛을 놓지 못하는

값싼 슬픔의 빙과류

 

안녕? 나는 스크류바*라고 해

공산품이 아니야 사과맛 딸기맛 식물류로 분류되지

푸른 잎은 없지만 나무 기둥 부여잡고 꽁꽁 얼었지

내 슬픔은 너무 오랫동안 얼어있어, 드릴처럼 생긴 나는

내 슬픔에 맞는 입술하고만 대화를 해

슬픔을 까 녹아 사라질 때까지

제 고집의 색깔로 제 혓바닥에만 짙게 남아 있는

 

탱크보이**에게 강간당한 쭈쭈바라고 해

배맛 아이스크림 중에서 가장 배맛 닮았지

하얗고 차가운 임신을 한 나는 둥근 손바닥 안에서

허물허물 유산을 하지

일회용 콘돔 같은 나의 배는,

투명 비닐 안에서 공기로 남아 후 불면 또 임신해

 

안녕?

나는 슬픔의 빙과류라고 해

아무것도 아니지만

꽁꽁 얼어 차가운 전설 같은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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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류바 : 롯데제과가 선두 빙과업계로 올라서는 데 기여한 1등 공신 제품.

** 탱크보이 : “더위를 한방에라는 광고 문구 아래 해태제과가 만든 쭈쭈바.

   

 

 

산수국 - 김영미

 

한라산 둘레 깊은 길섶에

푸른 산수국은 안개비에 젖어도

바람에 흔들린다

잘디잘게 부서진 꽃잎만으로는

애처로운 사연 다 전할 수 없어

제 마음 아닌 마음을

덧대어 붙이고

 

사는 게 다 그렇지

어찌 다 보여주며 살아졌던가

부서지고 멍든 가슴은

헛꽃 몇 장 밑에 숨겨두고

헤살헤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잔바람에도 파르르 떨리는

헛꽃이 되어

푸른 심장이 되어

   

 

 

자가진단 - 안은주

 

   언젠가부터 무엇을 먹을 때마다 돌 같은 것이 씹혔습니다. 삶은 달걀을 먹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러다가 침을 삼킬 때도 돌은 마구 내 입안을 돌아다녔습니다. 거울 앞에서 아귀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들여다보니 오른쪽 맨 끝 어금니가 깨어져 있었습니다. 혀로 긁어 보았더니 허무하게 부서져 나갔습니다. 언제나 나는 그 무엇을 먹을 때마다 내 어금니도 함께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알 수 없는 소리에 봄밤을 설치곤 했었는데 그렇게 먹은 어금니 조각들이 뱃속에서 내 대신 앓고 있었나 봅니다. 어금니는 깨졌고 다시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치명적인 병은 아니지만, 구멍을 메우러 치과에 가야겠습니다. 이가 시리기 전에 이물스러움을 없애기 위해서요.

     

 

빗줄기의 힘 - 양순진

   -팽목항 세월호 앞에서

 

팽목항에는 눈 감지 못하는 저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풋내 나던 아이들 꿈의 출항 침몰에 휩싸여 비명마저 잠겨버렸을 때

고래만한 절망 조국을 덮었다

 

더러는 생존하고 더러는 꽃이 되어 피울음 바다로 물든 나날

바다에 안겨 영영 볼 수 없는 아홉 명의 흔적

천 일 동안 한 순간도 포기하지 못한 채 등대로 서 있는 부모에겐

넋 놓고 갈매기로 떠도는 가족들에겐

날 선 그리움의 난간이었다

그 오랜 속수무책은 인장 같은 노란 리본만이 증명할 뿐

책가방 속 꿈들은 치어처럼 선명하게 공중을 떠돈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세월호는 과중한 죄목의 무게로

잃어버린 삼 년 인양하지 못해 빗줄기의 힘 빌려 끌어 올린다

비는 보았다, 침몰에서 통곡까지 한탄에서 봉쇄까지

해답 없는 절규는 천 년보다 긴 천 일의 파노라마였다

 

팽목항 녹슬어가는 기억의 문 저편

노을에 절인 참담의 뱃무덤 떠오르고 있다

더러는 왜곡되고 더러는 불분명한 사유로

찬란한 청춘 유린당한 아름다운 꽃들에게 누가

재생의 빛 환원해줄 것인가

 

때로 침묵은 통분보다 강하다지만

오늘은 살아 있어 부끄러운 목격자들 함성이

치졸한 침묵을 쓰러뜨릴 것이다

바다는 어린 꽃들을 껴안은 채 수심의 돌기 휘몰아

오직 칼날 같은 빗줄기 힘으로

묻혀진 진상 규명 끌어올리고 있다

     

 

발록* - 오광석

 

   황홀한 사랑을 찾아 세상의 경계를 찢었지 불타는 사랑을 하고 싶어 스스로 불이 되었지 거대한 뿔은 의지가 자라 생긴 돌연변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춤을 추는 화신 불의 세상에서 튀어 오른 그는 심장이 활활 타오르다 불사의 생물이 되었지 불꽃의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터지는 마음의 빙벽 불타는 몸을 껴안고 심장 깊숙이 불길을 마시면 온몸을 돌고 도는 불의 혈액들 용암처럼 끌어 오르는 유혹이 터져 붉어진 얼굴로 내미는 입술 작은 구멍과 구멍이 만나는 뜨거운 입맞춤 오므리다 벌어지면 불타는 혀가 입속에 불길을 토해내지 불의 날개가 자라나 날아오르게 하지 무너지는 세상을 느끼며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의 문이 열리지 무거운 현실의 짐을 벗어던지고 마법 같은 사랑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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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괴수.

     

 

십대 - 이영주

 

  불과 물. 우리는 서로를 불태우며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망해가는 나라니까. 악천후의 지표니까. 우리는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부을 붙였고, 오줌을 쌌고, 자주 울었고, 나무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개민들레 - 이종형

 

괄시해선 안 되는 목숨들이라고

유월의 햇살이 말했다

 

토종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추방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작고 여린 목숨일지라도

저항의 방식 하나쯤은 있는 법

여린 홀씨 하나로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노란 꽃대 밀어 올리는 저 견고한 힘

 

이제 여기가 내 집이라고 명토 박듯

그렇게 섬의 생명으로 거듭 환생한

저 노란꽃 무더기들

한라산 들판에 피어 흔들리고 있다

 

제 근본이었던 땅을 떠나고 싶어 떠났겠냐고

바다 건너 이 섬까지 흘러오고 싶었겠냐고

살아보겠다고 씩씩하게 살아보겠다고

연삼로 꼼장어 구이 집에서 서빙 하던

베트남 여인 꿍웬

그녀 오늘도 노랗게 노랗게 웃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