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심惟心 - 강연옥
허공이 벼랑에 기댄 건지
벼랑이 허공에 기대선 건지
기댄다는 말이 마음에 들어온 날 벼랑으로 서본다
발밑이 까마득한 벼랑으로 서보면
가슴에 칼바람 칠 때마다
나를 뿌리로 잡고 있는 것들이
나와 더불어 있는 것들이
내 몸 여기저기서 돋아나와 흔들린다
타박상의 자화상이다
늑골 깊숙한 바위틈마다 절규하는 바람 소리
풀숲 풀벌레 애잔한 소리에 귀를 열며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것은 나름
수없이 곤두박질하여 내리꽂히려는 마음속 저항이다
때론 벼랑으로 서본다는 것은
자신을 허공에 유배하여
자신을 지옥으로 만들어
마침내 자기 안의 천국을 알게 되는 거
바람이 뒤편에서 몰아칠 땐 벼랑의 가슴은 안온해
허공도 벼랑에 안기는 것을 알게 되는 거
♧ 숙명에 대하여
오래도록 씨방에 갇혀 있던 씨앗, 멀리 날아가더니 바다로 떨어졌네, 어딜 가든 꽃을 피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며칠이고 둥둥 바다 위를 떠다녔네, 흙이 무엇인지 바다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네, 닿는 것마다 세상 처음이니까, 자신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버겁다며 그럭저럭 물결 따라 흘렀네
흔들리며 반짝이는 모든 것을 사랑이라 생각했네, 해초가 푸르러 바위섬에 손을 내밀었을 때 미끄러지는 마음, 그리하여 외로웠네, 늘 출렁이는 바닥, 사랑도 위안이 되지 못한 현기증이 일었네, 가도 가도 희망은 부풀었다 꺼지는 물거품, 잠깐 꽃이 피었다 지는 꿈이라고 생각했네
단단하지 않는 바다, 물컹거리는 슬픔이 파도로 일어서는 바다, 가꾸고 싶은 바다, 가꾸어지지 않는 바다, 폭풍우를 만나도 눈보라가 내려도 피할 곳이 없네, 우산도 집도 의미 없고, 바다에서 산다는 건 무조건 떠 있어야 한다는 거, 슬피 울어도 그보다 더 짠 바다, 눈물이어도 눈물이 되지 않는 바다
손 없이 발 없이 단단한 마음으로 떠다니다, 석양이 비린내로 가라앉은 밤, 가슴속에 노을 닮은 꽃봉오리 허락하리, 태양 속에 심으로 박혀 꽃 피우고 아침이 되리라, 해가 질 때마다 꽃은 피어난다는 걸,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 손바닥선인장
젖은 세월 단단히 품은 가슴, 보신 적 있나요, 가슴에서 살을 헤집고 돋아난 가시, 보신 적이 있나요, 월령리 바닷가에 가보세요, 현무암에 자리한 선인장, 바위를 들어 올릴 기세로 파도가 몰아쳐도 흔들림이 없네요
먼 옛날 파도에 실려 들어 보금자리로 앉기까지 나이는 바람처럼 매일매일 불어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지요, 아무리 할퀴어도 불어오는 바람, 가시를 훈장처럼 키우며 하늘을 받드는, 그게 대단한 삶이라 생각했어요
가시가 굵어지며 찢어도 찢기지 않는 허공, 수평선에서 수없이 사라지는 태양의 영광 오래도록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으려 가슴에 바다를 넓히네요, 가시를 키운 게 죄여서
* 강연옥 오한욱 부부시집 '아낌없는 하루'(현대시 시인선 173, 2017)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9월호와 풍란 (0) | 2017.09.04 |
---|---|
조한일 시집 '지느러미 남자' (0) | 2017.09.02 |
김수열 시집 '물에서 온 편지' (0) | 2017.08.26 |
洪海里 시집 '비밀'에서 (0) | 2017.08.21 |
타래난초를 노래한 시들 (0) | 2017.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