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몸의 시
내 시에는 거추장스러운 데가 많다
거추장스러워 가려야할 데가 많다
가려야 할 데가 많아 입고 또 입어야 한다
하여, 나탈리 망세의 파격 같은 선율이 없다
내 시에는
♧ 슬픈 문자
시인을 남편으로 둔 어느 선생
세월호 참사 1주기 맞아 학생들에게
동영상으로 시 한 편 소개하고 감상을 묻는데
한 학생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하더란다
요즘도 시인 있어요?
시인은 뭘로 돈 벌어요?
핸드폰 문자로 그 내용 전해 받은 시인
요즘 시가 읽히지 않는 것보다
시집이 전혀 팔리지 않는 것보다
시인으로 산다는 게 더 슬펐다
혼자 슬퍼서 홀로 마셨다
♧ 인생
안개 자욱한 아침
둥지를 나온 박물관 한 채가
양손 가득 검은 비닐 들고
자벌레 기듯 먼 길 가고 있다
저 휜 등이 고개를 넘으면
궤도 벗어난 별똥별처럼
한 마을의 우주도 가뭇없이
지워지겠다
♧ 성탄 전야
겨울 연탄을 들이지 못한 젊은 부부의
새된 소리가 함석지붕을 넘는가 싶더니
아내 같은 여자가
빈 바람처럼 운다
그 바람에 놀란 아랫녘 개가
한껏 움츠리다 돌아눕고
끝이 매서운 칼바람이
멀구슬 지나 동네에서 제일 높은
예배당 첨탑을 휘감는다
빈 하늘에 매달린 십자가만
까닭 없이 깜빡거렸다
♧ 수국
간밤 비바람이 심한 탓일가
사려니 길섶에 수국이 낭자하다
더러는 찢기고 더러는 꺾이고
아직 덜 여문 꽃망울
파리한 얼굴을 흙바닥에 묻었다
인기척에 놀란 노루가
때죽낭 사이로 총총총 사라진다
검은 까마귀 검게 울고
수국수국 수국꽃이 운다
나라가 걱정이다
나라가 걱정이다
♧ 꽃양귀비
다들 어디 갔나 궁금했는데
유형의 당 시베리아 이루크츠크
좌절한 혁명가의 뜨락에 모여 있더구나
그때 마음일까
붉디붉게 모여 있더구나
내일이 오는 쪽을 내다보면서
저리도 뜨겁게 모여 있더구나
♧ 바닷물은 쓰다
칠성판 등에 지고 저승문턱 오락가락
반세기 넘도록 바당밭 일구다
대상군 자리 큰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집에서 노느니 할망바당에라도 나가
물질 나간 큰며느리 대신
오물조물 보말 잡아 저녁 찬거리 장만하는
소섬 할머니는
바닷물이 쓰다 하신다
모르는 사람들은
바닷물이 짜다 하는데
소섬에서 나고 소섬에서 자란 소섬 할머니는
바닷물이 쓰다 하신다
* 김수열 시집 「물에서 온 편지」(삶창, 2017.)에서
사진 - 올레 12코스 신도, 고산 바닷가에서(2017.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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