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조한일 시집 '지느러미 남자'

김창집 2017. 9. 2. 12:40



시인의 말

 

사막을 밤낮으로 건너가는 캐러밴의 첫 여정을

우여곡절 끝에 서툴게 혹은 어색하게 끝냈다.

 

여태 왔던 길을 거울삼아 이제 두 번째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낙타도 갈아타야 한다.

 

목이 말라 끝낸 여정이 아니다.

 

물맛도 모르면서 그저 물, 물만 찾던 내가 어리석어서다.

 

20177

조한일

 

 

 

 

나사못을 줍다

 

갈바람이 버려진 널 그렇게 흔들어놓아

길가에 낙엽처럼 뒹굴고 있더라도

다 알아,

휘어지지 않는 널

한 방을 기다리는 널

 

뒤통수 맞고 사는 게 너뿐이다 생각 마라

뼈마디 휘어가며 붙드는 소용돌이에도

가슴엔

별수 없는 잔정들이

헛도는 거란 말이야

 


 

오래된 안경집을 열며

 

오래전에 안경집을 서랍 깊이 심었는데

그곳에서 벌목된 시력, 나이테만 남았네

시신경 길들여주던 렌즈 가득 열린 세월

 

새 안경에 익숙해진 형상들이 굴절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 간극이 벌어지네

어차피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보는 세상

   


   

청산가리

 

뒷덜미 잡아채는 잡것들과 저 가짜들

휘뚜르마뚜루 널어놓은 자갈길 가시밭길

긴 겨울 지나고 나면 풀잎 사이 햇살일 듯

 

비선秘線이 곰팡이처럼 뼛속까지 번졌어도

뚜벅뚜벅 어서 가자 멀지 않은 그곳으로

촛불이 바다를 이뤄 넘실대는 세상으로

 

물어물어 내비 없이 지며리 닿게 되는

우리의 가슴 속에 솟아오른 산마루

기어코 가고야 말 거기 청산靑山 가리 청산가리

 


 

 

설앵초

 

그랬겠네,

애월바람에 실려 와 피었겠네

 

백록담 오르는 길

안개낀 만세동산

 

덜커덩

바람이 흔들어놓는

수레바퀴 도는 소리

 

 

 

, ,

 

반의반도 차지 않은

두 개의 와인 잔

 

그것들을 부딪쳐보면

침묵이 허물어진다

 

우리는

그런 잔이 되어

흔들리며 살아가지

 

속이다 들여다뵈는

깨지기 쉬운 우리

 

비웠다 채웠다 하다

쨍하고 와 닿으면

 

모른 척

어깨를 내주며

생을 위해 건배하지


 

 

목수와 트럭

 

힘줄 선 목수 김 씨의 오선지 같은 저 팔뚝

오늘도 툭탁툭탁 4분음표 못을 박으면

한평생 한 박자로 부르는

노동요가 들린다

 

길모퉁이에 웅크렸던 1톤 트럭 그 이마엔

부적처럼 주차 위반 딱지 배짱 좋게 버티고

크르릉 시동 소리에

안마의자 들썩인다


 

  

지느러미 남자

 

  아침부터 당도한 문자 열나흘째 폭염 특보

 

  오늘도 동문로터리 붐비는 수산시장 삼십 분 무료 공용주차장 귀퉁이에 오래된 봉고1톤 탑차 부축해 앉혀둔다 흐르는 땀 눈에 들면 어찌나 따가운지 이마에 버프 질끈 두르고 은갈치 상자 나르는데 머리 많이 아프우꽈? 물어보는 주인아줌마 아무래도 우리 땅에선 이 모습이 낯선 걸까? 배달엔 젬병인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잠깐만 잠깐만요, 비켜주세요, 외쳐 봐도 꿈쩍 않는 밭담보다 더 길어진 제주땅 중국인 행렬 배워둘 걸 중국어, 왁자지껄 좁은 시장통 크루즈 타고 온 서양인들 옆을 지날 땐 익스큐즈 미, 익스큐즈 미, 24년 밥 먹여준 영어가 모세의 기적같이 동문수산시장 길을 튼다 달그락대는 낡은 손수레가 지나는 고객과 부딪칠까 연신 되뇐다 제발 비켜달라고, 제발 비켜달라고, 은갈치님 나감수다, 옥돔님 납셔수다 제주바당 동문이 날마다 모이는 동문시장, 때로는 고등어도, 삼치도, 참조기도 얼굴을 내밀지만 역시 우리 회장님은 반짝반짝 은갈치다 냉동 짐칸 다 비우고서야 돌아온 그 주차장에서

 

  파르르

  내 젖은 몸에 돋아나는

  지느러미

 

 

       * 조한일 시집 지느러미 남자’(고요아침, 2017)에서

       * 사진 - 요즘 한창 피고 있는 짚신나물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