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수열 '신촌가는 옛길' 외 5편

김창집 2017. 9. 6. 18:08



신촌 가는 옛길

 

원당사와 불탑사가 고즈넉이 마주앉은 길

기증편 떡구덕 등에 지고

어멍 손심엉 식게 먹으러 가던 길

열무 이파리 아삭아삭 씹히는 길

밭담 위 늙은 호박까지

펑퍼짐하게 두런두런 옛말 나누는 길

물마루 건너온 등 굽은 바람이

이마를 톡 치고 가는 길

수런수런 수련 사는 남생이못

가끔 그렇게 흔들려도 좋을 길

길섶 억새들 배웅 받으며

한 번쯤은 어린 덕구가 밥차롱 허리춤에 차고

돌아보고 돌아보며 걸었음직한 길

 


 

 

잔치커피

 

섬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도

잔치커피를 마신다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섬사람들은 잔치커피라 하는데

장례식장에 조문 가서 식사를 마치면

부름씨하는 사람이 와서 묻는다

녹차? 잔치커피?

 

잔치커피, 하고 주문하는 순간

장례식장의 자는 휙 날아가고

순간 예식장으로 탈바꿈한다

명복을 비는 마음이야 어디 가겠냐만

왁지지껄 흥성스러운 잔치판이 된다

보내는 상주도 떠나는 망자도 조금은 덜 슬퍼진다

 

섬에서는

죽음도 축제가 되고

섬에서 죽으면

죽어서 떠나는 날이 잔칫날이다

망자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도

달달한 잔치커피에 중독이 된다

 

 

 

 

고부

 

  예순 살짝 넘긴 며느리가 여든 훌쩍 넘긴 시어매한테 어무이, , 오도바이 멘허시험 볼라요 허락해 주소 하니 그 시어매, 거 무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얼릉 가서 밭일이나 혀!

  요번만큼은 뜻대로 허것소 그리 아소, 방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떠듬떠듬 연필에 침 발라 공부를 허는데, 멀찌감치 앉아 시래기 손질하며 며느리 꼬라지 쏘아보던 씨어매 몸빼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 읍내 나가 물어물어 안경집 찾아 만 원짜리 만지작거리다 만 오천 원짜리 돋보기 사 들고 며느리 앞에 툭 던지며 허는 말, 거 눈에 뵈도 못 따는 기 멘허라는디 뵈도 않으믄서 워찌 멘헐 딴댜? 아나 멘허!

 


 

 

102살 할매도 여자다

 

 육십년 전에 아들 먼저 보내고 여든 넘은 며느리 봉양 받으며 단둘이 사는 백두 살 할매가 어느 볕바른 봄날 평상에 앉아 며느리에게 머리 손질 맡기고 아슥아슥 졸고 계시다

 어머님 다 됐슈, 거울 한번 봐유

 거울 보던 할매 옆머리 매만지더니, 이게 뭐여, 쥐 쎄무랐어?

 거울 팽개치고 안으로 들어가 모로눕더니 꿈쩍도 않으신다

 읍내장 가서 좋아하는 꿀떡 사다 드렸는데도 손사래 치며 날카롭게 한 말씀 하신다

 내 그렇게 말했잖여, 읍내 미장원 가서 머리 허겄다고

 시방 이 머리 갖고 워떻게 노인회관엘 댕겨!

 

 옆에 앉은 며느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꿀떡만 만지작만지작

 

 

 

 

보말죽

 

보말이 보말이주, 보말을 뭐셴 고라?

고메기? 난 몰라, 우리 동네선 그자 보말

 

물 싸민 갯것이 강 그거 잡아당

솥단지에 놩 개끔 부각헐 때꼬지 솖앙

이불바농으로 눈 멜라져가멍 토다아장 그걸 파내엉

딱지도 떼내곡 또시 고는 채에 놩

손으로 박박 문대기믄 요물은 남곡 똥은 헤싸지곡

똥 헤싸진 물에 곤쏠 불린 걸 놩 보글보글 끓을 때

보말 요물 넣곡 당근 송송 썰어 넣곡 마늘쫑 쫑쫑 썰어 넣곡

다시 바질바질 끓으민 약헌 불에 맞췅 촘지름 넉넉허게 놩

휘휘 저시믄 그게 보말죽이주

배추김치에 참깨 절인 것에 혼번 먹어봐, 잘도 코시롱허여

 

무싱거? 깅이죽? 거 쓸데어신 소리 마랑

요레 아장 이 보말이나 파라

, 바농!

 


 

 

비양도에서 한나절

 

섬에서 멀어진다는 건

다시 섬에 가까워진다는 것

 

비양호에서 내려

섬햇살과 만나 섬언어로

섬이야기 두런두런 전하고

섬바람과 만나 섬언어로

섬이야기 귀담아 듣고

 

오름 위 등대에 오를까, 하다 관두고

해안길 걸을까, 하다 그마저 관두고

 

세 명의 어린 섬들이 까르르 뛰노는

키 작은 운동장 기웃대다가

호돌이식당 보말죽으로 허기 채우고

펄랑못에 앉아 몇 자 끄적이는데

 

섬에서 멀어진다는 건

다시 섬에 가까워진다는 것

섬을 떠났지만 결국

섬으로 돌아온다는 것

 

 

                    * 김수열 시집 물에서 온 편지’(삶창시선 49, 2017)에서

                                          * 사진 : 붉은사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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