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촌 가는 옛길
원당사와 불탑사가 고즈넉이 마주앉은 길
기증편 떡구덕 등에 지고
어멍 손심엉 식게 먹으러 가던 길
열무 이파리 아삭아삭 씹히는 길
밭담 위 늙은 호박까지
펑퍼짐하게 두런두런 옛말 나누는 길
물마루 건너온 등 굽은 바람이
이마를 톡 치고 가는 길
수런수런 수련 사는 남생이못
가끔 그렇게 흔들려도 좋을 길
길섶 억새들 배웅 받으며
한 번쯤은 어린 덕구가 밥차롱 허리춤에 차고
돌아보고 돌아보며 걸었음직한 길
♧ 잔치커피
섬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도
잔치커피를 마신다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섬사람들은 잔치커피라 하는데
장례식장에 조문 가서 식사를 마치면
부름씨하는 사람이 와서 묻는다
녹차? 잔치커피?
잔치커피, 하고 주문하는 순간
장례식장의 ‘장’자는 휙 날아가고
순간 예식장으로 탈바꿈한다
명복을 비는 마음이야 어디 가겠냐만
왁지지껄 흥성스러운 잔치판이 된다
보내는 상주도 떠나는 망자도 조금은 덜 슬퍼진다
섬에서는
죽음도 축제가 되고
섬에서 죽으면
죽어서 떠나는 날이 잔칫날이다
망자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도
달달한 잔치커피에 중독이 된다
♧ 고부
예순 살짝 넘긴 며느리가 여든 훌쩍 넘긴 시어매한테 어무이, 나, 오도바이 멘허시험 볼라요 허락해 주소 하니 그 시어매, 거 무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얼릉 가서 밭일이나 혀!
요번만큼은 뜻대로 허것소 그리 아소, 방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떠듬떠듬 연필에 침 발라 공부를 허는데, 멀찌감치 앉아 시래기 손질하며 며느리 꼬라지 쏘아보던 씨어매 몸빼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 읍내 나가 물어물어 안경집 찾아 만 원짜리 만지작거리다 만 오천 원짜리 돋보기 사 들고 며느리 앞에 툭 던지며 허는 말, 거 눈에 뵈도 못 따는 기 멘허라는디 뵈도 않으믄서 워찌 멘헐 딴댜? 아나 멘허!
♧ 102살 할매도 여자다
육십년 전에 아들 먼저 보내고 여든 넘은 며느리 봉양 받으며 단둘이 사는 백두 살 할매가 어느 볕바른 봄날 평상에 앉아 며느리에게 머리 손질 맡기고 아슥아슥 졸고 계시다
어머님 다 됐슈, 거울 한번 봐유
거울 보던 할매 옆머리 매만지더니, 이게 뭐여, 쥐 쎄무랐어?
거울 팽개치고 안으로 들어가 모로눕더니 꿈쩍도 않으신다
읍내장 가서 좋아하는 꿀떡 사다 드렸는데도 손사래 치며 날카롭게 한 말씀 하신다
내 그렇게 말했잖여, 읍내 미장원 가서 머리 허겄다고
시방 이 머리 갖고 워떻게 노인회관엘 댕겨!
옆에 앉은 며느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꿀떡만 만지작만지작
♧ 보말죽
보말이 보말이주, 보말을 뭐셴 고라?
고메기? 난 몰라, 우리 동네선 그자 보말
물 싸민 갯것이 강 그거 잡아당
솥단지에 놩 개끔 부각헐 때꼬지 솖앙
이불바농으로 눈 멜라져가멍 토다아장 그걸 파내엉
딱지도 떼내곡 또시 고는 채에 놩
손으로 박박 문대기믄 요물은 남곡 똥은 헤싸지곡
똥 헤싸진 물에 곤쏠 불린 걸 놩 보글보글 끓을 때
보말 요물 넣곡 당근 송송 썰어 넣곡 마늘쫑 쫑쫑 썰어 넣곡
다시 바질바질 끓으민 약헌 불에 맞췅 촘지름 넉넉허게 놩
휘휘 저시믄 그게 보말죽이주
배추김치에 참깨 절인 것에 혼번 먹어봐, 잘도 코시롱허여
무싱거? 깅이죽? 거 쓸데어신 소리 마랑
요레 아장 이 보말이나 파라
마, 바농!
♧ 비양도에서 한나절
섬에서 멀어진다는 건
다시 섬에 가까워진다는 것
비양호에서 내려
섬햇살과 만나 섬언어로
섬이야기 두런두런 전하고
섬바람과 만나 섬언어로
섬이야기 귀담아 듣고
오름 위 등대에 오를까, 하다 관두고
해안길 걸을까, 하다 그마저 관두고
세 명의 어린 섬들이 까르르 뛰노는
키 작은 운동장 기웃대다가
호돌이식당 보말죽으로 허기 채우고
펄랑못에 앉아 몇 자 끄적이는데
섬에서 멀어진다는 건
다시 섬에 가까워진다는 것
섬을 떠났지만 결국
섬으로 돌아온다는 것
* 김수열 시집 ‘물에서 온 편지’(삶창시선 49, 2017)에서
* 사진 : 붉은사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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