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권경업의 가을 시편

김창집 2017. 10. 22. 09:12



꾸물거리는 날씨의 일요일 아침,

원고에 밀려 산에도 못 가고

잠시 틈을 내어,

부산 산 사나이 권경업의 가을 시편으로 

여유를 찾는다.

 

지난 목요일은 올레 14코스,

금요일에는 대록산과 소록산을 다녀와서,

억새만 많이 보았지

단풍 소식은 감감하다.


지금 산에 단풍이 들기나 하는 건지

다음 주말이나 산 나들이 해야겠다.

 

 

 

가을 산행

 

세상살이 마흔이 넘으면

가끔은 까닭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떠나는 가을 앞에선 더욱

예전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고추잠자리 한둘씩 사라지고

모두 제 갈 길로 바삐 가버리면

왠지 모를 설움은

그냥 그러려니 서 있을 수 없게 한다

 

여름날의 땀방울 거두어간

빈 들녘의 언저리

흔들리는 계절의 창백한 억새밭에서

자꾸 빨리 떠나라며 보채는 바람에

나는 등 떠밀리며 실컷 울고 있었다

 



시월

 

시월에는, 술 몇 병 없이

취밭목에 가지 마세요

 

신갈 숲 서걱이는 달빛

가슴 젖어 흥건히 시리기라도 하면

고단한 세상 길 그 어디쯤

발목 아릴 그리운 사람

꺽꺽, 목 메이게 그립기에

 

시월에는, 제발

술 몇 병 없이 취밭목에 가지 마세요.



 

 

흔들리는 갈대의, 길에게 띄우는 편지

 

이제 와서 되돌아 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너와 나는 두려움의 강 앞에 서 있다

돌아가자니 온 길이 수고스러웠고, 나아가자니

강은 깊어 헤어날지가 의문이다

설령 건넜다 하더라도 상강霜降을 며칠 앞둔

젖은 몸과 마음에 하얀 겨울만 매섭게 기다릴 뿐

뼛속까지 아릴 그 추위를 차마 견딜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너를 무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저 강변의 흔들리는 갈대처럼, 어쩌지 못해

밤새 서걱서걱, 제 속을 비워가며 울고 있을 뿐

여기까지 함께 한 너와의 길에

때로는 부르트고 때로는 갈라지던 그 발과 종아리를

강물에 담그고 서 있어보지만

너와 함께 건널 수 있는, 아니

건너서는 안 될 강임을 나는 안다

 

 

 

가을 섬진강

 

지친 여정旅情에도 단풍빛

꽃물처럼 휘감은 화개천을 만나, 밤새

몸 섞어 뒤척이며 몸 섞어 하나 된 물길 5백리

인정스러운 마을만 휘돌아온 잔잔한 미소만 있습니다

떨던 피아골 골 깊은 두려움은 없습니다, 이제

지리산 마루 하늘의 모습으로

벌건 황톳물 갈앉혀, 아래로 아래로

정성스레 키워낸 재첩알들로, 언제나

남도南道의 정 뽀얗게 나누려는

광양 억양의 하동사람과

하동 말투의 광양 사람만 있습니다

앞앞이 말 못한 쓰린 속은 없습니다

형제봉 마루 매일 밤하늘 이울 때

새벽강물 긷던 손으로 소리쳐, 건너편

친정 아비의 안부를 묻던 백발이 되었을 악양 새댁과

아랫도리 벗어 머리에 이고, 둥둥

허기진 한낮을 맨살로 건너

다압多鴨 외가外家로 가던 작인作人의 어린놈들

아마 반백半白의 추억에 잠기게 할

저무는 가을강만 있습니다, 금빛 모래톱

배고파 따라오던 서러운 발자국은 없습니다

가물어 마른 몸에

품기에도 버거운 왕시루봉과 백운산이지만

회남재 넘어 쫒던 이, 쫒기던 이, 다를 것 없이

속으로, 속으로만 골골거리며 삭히던

아픔도 분노도 백골처럼 다 사그라졌다며

이제는 그냥가자, 바다로 가자고

뱃살에 기름 올라 펄떡일 전어錢魚

남은 이빨 몇 없어도 고소할, 바다로 가자고

말없이 소매를 잡아끌며, 쉬엄쉬엄

굽 돌아 흐르는 가을, 늙은 섬진강만 있습니다

    


   

단풍, 무서리에 젖은 가슴은 시려

 

나는 안다, 조금은 낡은 듯한

작은 스케치북 앙가슴 곱게

아직도 수채화를 그려가는 이를

 

장당골 빈 바람에

내어 말리는 마르지 않은 물감

무서리에 젖은 가슴은 시려

밤마다, 발갛게 제 몸을 태우는

 


 

 

차마, 차마 나누지 못했던 말들이

 

쑥밭재 가을 잿마루에 귀를 대면

총총, 떠나보낸 젊은 날이 저만치

아름다운 날들이 저만치

 

조개골 은빛 눈방울로 구르던 사랑아

이제는, 갈꽃 흐드러진 하구河口 어디쯤

지친 다리쉼 할 사람아

느릅나무 빈 가지를 흔드는

너의 순결 같은 바람에게서

차마, 차마 나누지 못했던 말들이

파랗게 묻어나오고

나는 종일 이명耳鳴에 귀를 앓는다

 

 

*권경업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사진 : 작년 10월말에 찾았던 붉은오름의 가을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