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사이 - 공광규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 세워 할퀼 일도 없겠어요
손목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어요
♧ 한 잎 - 김용택
초록의 새 잎 위로
이슬비가 건너가듯
나는 그대를 향해
한 잎 두 잎 건너갑니다.
오!
바람이 불면
초록의 새 잎 위를 건너가듯
나는 그대를 향해
한 잎 두 잎 건너가는
맨발의 이슬비였답니다.
한 잎, 또 한 잎,
다시 또 새롭게 한 잎,
그 나무 잎 위로 건너 와 앉아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하얀 나비랍니다.
♧ 나무 - 도종환
퍼붓는 빗발을 끝까지 다 맞고 난 나무들은 아름답다
밤새 제 눈물로 제 몸을 씻고
해 뜨는 쪽으로 조용히 고개를 드는 사람처럼
슬픔 속에 고요하다
바람과 눈보라를 안고 서 있는 나무들은 아름답다
고통으로 제 살아 다가오는 것들을
아름답게 바꿀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잔가지만큼 넓게넓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답다
허욕과 먼지 많은 세상을
견결히 지키고 서 있어 더욱 빛난다
무성한 이파리와 어여쁜 꽃을 가졌던
겨울나무는 아름답다
모든 것을 버리고나도
결코 가난하지 않은 자세를 그는 안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은 아름답다
오랜 세월 인간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해 더욱 아름답다
♧ 숲 - 복효근
나무가 나무에 기대어
숲을 이루다
저희가 가진 것 없어 얽히어
온몸으로 내가 너다
소나무는 박달나무라는 이름으로
소나무다 소나무를
아무도 숲이라 하지 않는다
소나무로 하여
박달나무가 숲이다
그리하여 소나무는
숲이다 박달나무는
오리나무는 하다못해 찔레
나무는 상수리나무는
그래서 비로소 숲이다
만약 소나무가 박달나무로 하여
숲이 아니라면 이 숲 속의
그리움은 누구 것이냐
머리 위에 빛나는 하늘은
바위는 또 냇물은
무엇의 사랑이냐
숲 속 나무에 기대어
내게 지닌 것 모두
제 자리에 돌려주고
한 마리 순한 짐승으로
내가 숲이 된다
내가 숲이다 내가 너다
♧ 간격 -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 나무들의 결혼식 - 정호승
내 한평생 버리고 싶지 않은 소원이 있다면
나무들의 결혼식에 초대 받아 낭랑하게
축시 한번 낭송해 보는 일이다
내 한평생 끝끝내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우수가 지난 나무들의 결혼식 날
몰래 보름달로 떠올라
밤새도록 나무들의 첫날밤을 엿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내 죽기 전에 다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은은히 산사의 종소리가 울리는 봄날 새벽
눈이 맑은 큰스님을 모시고
나무들과 결혼 한번 해보는 일이다
‘산림문학’ 2017년 가을호(통권27호) ‘초대시’에서
사진 : 시오름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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