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한희정 시집 '그래, 지금은 사랑이야'

김창집 2017. 11. 28. 01:39



작가의 말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계절이 두어 번 바뀌는 사이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예견된 일이든

아니든 간에

지나간 시간들은

내 삶에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또한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세 번째 시집으로 방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사랑을 주고 가신

아버지 영전에 이 시집을 바칩니다.

 

20179

한희정

    


 

 

눈길

 

한 발 내딛기 송구한 순백 앞에서 있다

 

흐릿한 이정표만큼 나도 함께 갇히고 싶은

 

뽀드득 밀치고 든다, 숨기고픈 내 함량

 

자국의 깊이만큼 내 깊이면 좋겠다

 

뒤돌아 본 발자국에 다시 눈이 덮이면

 

그 잠시 욕심을 내려 더 선명히 찍고 싶다

    


 

 

감자 이삭줍기

 

흙은 아직 온기 남아

기다리는 손길 있다

이랑 경계 무너져도

네 자취는 분명하다

하얗게

꽃피던 그날 결백을 짐작했던,

 

묻혔던 네 실체는 벗겨진 살갗으로

진실을 증명하듯

뭉클하게 다가올 쯤

저만치

심지 올리는 꽃향유도 반갑다

    


 

 

어리목

 

그 순간 진심이라, 사랑이라 말하려거든

이곳에 발 놓지 마시라 괜한 투정 마시라

수많은 발길질에도 가슴 죄다 열었으니

 

한때는 오름과 오름 단절을 꿈꾸었을,

숲은 하늘 가렸고 계곡은 메아릴 숨겼다

입산 길 허기진 저녁 생미 같은 별빛 한 말

 

, , 말 가득차도 길은 더 침묵했다.

달빛 촉촉 내린 밤은 풍문도 진실 같아

숨겨온 그리움들을 산그늘에 포갠다

    


 

 

섬산수국

 

어젯밤 사락사락 예까지 내린 별이

 

접이우산 펴기도 전에 소낙비를 맞았네

 

나무꾼 그 눈빛 같은 푸른 옷이 젖었네

사람 찾기 사이트도 나무꾼 행적 몰라

 

올레꾼 눈맞춤에 행여 따라 나설까만

 

소금끼 눈물 꼭 찍는 저기, 저 꽃 흔들려



 

겨울산

 

아느냐

이별이 슬픔만은 아니더라

 

격정의 사연일랑 그냥 그리 묻어두고

 

맘 놓아 통곡하고 나니

정녕 내가

    


 

 

겨울 멀구슬

 

이쯤이면 웃뜨르도 일곱물 바다 같다

 

만조의 시간 지나 다드러난 잔가지에

 

당고모 쌓인 세월이 알알이 절고 있다

 

육십 년 사설만큼 사랑 가득 인정 걸고

 

알 듯 말 듯 저 혼잣말 목젖까지 차올라도

 

물러진 멍울만큼이나 난바다 뭇별로 뜬다

 

    

 

 

순천만 서설

 

햇살도 곡선이 되는 순천만에 가보아라

몸 부비며 사부작대는, 촉수서는 저 숨결

갈대들 발끝 저려 와 풀파도가 되더라

 

흔들리며 산통 겪는 뭇 생명의 몸부림

개개비 제집처럼 해마다 둥지 트는,

끈적이 초유를 흘린 너른 가슴 보아라

 

허접한 시인 앞에 짱둥어의 육필사를

해종일 반점만 찍는 갯벌 게의 추임새를

물 빠진 마분지에다 찢기도록 쓰더라

 

누구든 이곳에선 절로 몸을 낮추더라

탁한 세상 걸러내어 허밍소리 정결한,

최후의 보루가 되는 미물들의 성소더라

 

 

           * 한희정 시집 그래, 지금은 사랑이야’(도서출판 각, 20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