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계절이 두어 번 바뀌는 사이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예견된 일이든
아니든 간에
지나간 시간들은
내 삶에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또한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세 번째 시집으로 방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사랑을 주고 가신
아버지 영전에 이 시집을 바칩니다.
2017년 9월
한희정
♧ 눈길
한 발 내딛기 송구한 순백 앞에서 있다
흐릿한 이정표만큼 나도 함께 갇히고 싶은
뽀드득 밀치고 든다, 숨기고픈 내 함량
자국의 깊이만큼 내 깊이면 좋겠다
뒤돌아 본 발자국에 다시 눈이 덮이면
그 잠시 욕심을 내려 더 선명히 찍고 싶다
♧ 감자 이삭줍기
흙은 아직 온기 남아
기다리는 손길 있다
이랑 경계 무너져도
네 자취는 분명하다
하얗게
꽃피던 그날 결백을 짐작했던,
묻혔던 네 실체는 벗겨진 살갗으로
진실을 증명하듯
뭉클하게 다가올 쯤
저만치
심지 올리는 꽃향유도 반갑다
♧ 어리목
그 순간 진심이라, 사랑이라 말하려거든
이곳에 발 놓지 마시라 괜한 투정 마시라
수많은 발길질에도 가슴 죄다 열었으니
한때는 오름과 오름 단절을 꿈꾸었을,
숲은 하늘 가렸고 계곡은 메아릴 숨겼다
입산 길 허기진 저녁 생미 같은 별빛 한 말
말, 말, 말 가득차도 길은 더 침묵했다.
달빛 촉촉 내린 밤은 풍문도 진실 같아
숨겨온 그리움들을 산그늘에 포갠다
♧ 섬산수국
어젯밤 사락사락 예까지 내린 별이
접이우산 펴기도 전에 소낙비를 맞았네
나무꾼 그 눈빛 같은 푸른 옷이 젖었네
사람 찾기 사이트도 나무꾼 행적 몰라
올레꾼 눈맞춤에 행여 따라 나설까만
소금끼 눈물 꼭 찍는 저기, 저 꽃 흔들려
♧ 겨울산
아느냐
이별이 슬픔만은 아니더라
격정의 사연일랑 그냥 그리 묻어두고
맘 놓아 통곡하고 나니
정녕 내가
보
이
더
라
♧ 겨울 멀구슬
이쯤이면 ‘웃뜨르’도 일곱물 바다 같다
만조의 시간 지나 다드러난 잔가지에
당고모 쌓인 세월이 알알이 절고 있다
육십 년 사설만큼 사랑 가득 인정 걸고
알 듯 말 듯 저 혼잣말 목젖까지 차올라도
물러진 멍울만큼이나 난바다 뭇별로 뜬다
♧ 순천만 서설
햇살도 곡선이 되는 순천만에 가보아라
몸 부비며 사부작대는, 촉수서는 저 숨결
갈대들 발끝 저려 와 풀파도가 되더라
흔들리며 산통 겪는 뭇 생명의 몸부림
개개비 제집처럼 해마다 둥지 트는,
끈적이 초유를 흘린 너른 가슴 보아라
허접한 시인 앞에 짱둥어의 육필사를
해종일 반점만 찍는 갯벌 게의 추임새를
물 빠진 마분지에다 찢기도록 쓰더라
누구든 이곳에선 절로 몸을 낮추더라
탁한 세상 걸러내어 허밍소리 정결한,
최후의 보루가 되는 미물들의 성소더라
* 한희정 시집 ‘그래, 지금은 사랑이야’(도서출판 각,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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