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洪海里 시집 '비밀'의 11월

김창집 2017. 11. 30. 11:05


11, 낙엽

 

울며불며 매달리지 마라

의초롭던 잎이 한때는 꿈이었느니

때가 되면 저마다 제 갈 길로 가는 법

애걸하고 복걸해도 소용없는 일

차라리 작별인사를 눈으로 하면

하늘에는 기러기 떼로떼로 날고 있다

한 겨울에 꼿꼿이 서있기 위해, 나무는

봄부터 푸르도록 길어올리던 물소리

자질자질 잦아들고 있다

몸도 마음도 다 말라버려서

비상 먹은 듯, 비상을 먹은 듯

젖은 몸의 호시절은 가고 말았다

무진무진

살아 보겠다고 늦바람 피우지 마라

지빈至貧하면 어떻고 무의無依하면 어떠랴

어차피 세상은 거대한 감옥

너나 나나 의지도 가지도 없는

허공의 사고무친 아니겠느냐

축제는 언제나 텅 빈 마당

파장의 적막이 그립지 않느냐

죽은 새에게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듯

모든 것이 멀리 보이고

너도 이제 멀리 와 있다

세상의 반반한 것들도 어차피 반반이다.

   


 

꽃이 지고 나서야 - 홍해리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너를 보고 싶었다

 

마음만 마음만 하다

눈멀고 귀먹고

 

마음이란 것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구나

 

꽃 지고 나서야

열매를 맺다니

 

꽃이 피면 뭣 하나

꽃 지면 뭘 해?

 

 


분수噴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만

물은 스스로 분수를 알아

적당한 높이에서

몸을 낮추고

한 송이 꽃을 피우면서 지고 마는

절정의 순간

햇살이 잠시 쉬었다 가고

바람도 옷자락을 흔들어 주고

흰구름이 가만히 손을 얹는다

금빛 꿈이란 늘 허망한 법

촉촉이 젖어 있는 너의 언저리

낭랑낭랑 흐르는 눈물의 반짝

허공에 부서진다.

 

 

 

억새 날다

 

웃는 걸까

우는 걸까

웃음이 울음 속으로 들어가고

울음이 웃음 밖으로 나오니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일,

바람 따라 온몸을 흔들면서

때로는 허리 꺾어 몸을 뉘고

산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친다

그 소리에 문뜩 산이 지워진다

굽이치는 것은 은빛 강물 소린가

천파만파 파도치는 소리인가

하늘과 땅이 구분 없이 흔들리고 있다

한여름 우렛소리 어디 가 잠들었다

눈물 마른 꽃잎 사이사이 반짝이고

굽이굽이 지나쳐 우는 듯 웃는 듯

우련우련 드러나는 산그림자

일장춘몽을 깨우고 있는 것인지

추풍낙엽을 쓸고 있는 것인지

울긋불긋 나뭇잎 다들 떠난 자리

바람 불 때마다 억새가 톱니를 갈아

칼날 같은 날개로 날아오르고 있다

희미한 달빛도 몸무게 많이 줄었다.

 

 

 

길에 대하여

 

한평생을 길에서 살았다

발바닥에 길이 들었다

가는 길은 공간이고 시간이었다

공간에서 제자리를 가고

시간에선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샛길로 오솔길로 가다

큰길로 한번 나가 보면

이내 뒷길로 골목길로 몰릴 뿐

삶이란 물길이고 불길이었다

허방 천지 끝없는 밤길이었다

살길이 어디인가

갈 길이 없는 세상

길을 잃고 헤매기 몇 번이었던가

꽃길에 바람 불어 꽃잎 다 날리고

도끼 자루는 삭아내렸다

남들은 외길로 지름길로 달려가는데

바람 부는 갈림길에 서 있곤 했다

눈길에 넘어져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빗길에 미끄러져도 손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가는 길에 어쩌다 마주쳐도

길길이 날뛰는 시간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인생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라 했지만

끝내 비단길, 하늘길은 보이지 않았다

날개는 꿈길의 시퍼런 독약이었다.

 


 

 

입동立冬

 

온 세상이

빨갛게,

익은 것 보았습니다.

 

낙엽 깔린 스산한 길,

급하게 달려오는

칼 찬 장군의 말발굽 소리 들리고,

 

영혼의 밑바닥에

은빛 그리움을 채우고 있는,

 

흰 이빨 드러낸 나무들

가지마다 꿈을 안고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하늘도

!

소리를 내며

나지막이 걸려 있습니다.

 

 

          * 洪海里 시집비밀(2010, 우리글)에서

            사진 : 어제(11.29) 서귀포 엉또폭포와 고근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