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낙엽
울며불며 매달리지 마라
의초롭던 잎이 한때는 꿈이었느니
때가 되면 저마다 제 갈 길로 가는 법
애걸하고 복걸해도 소용없는 일
차라리 작별인사를 눈으로 하면
하늘에는 기러기 떼로떼로 날고 있다
한 겨울에 꼿꼿이 서있기 위해, 나무는
봄부터 푸르도록 길어올리던 물소리
자질자질 잦아들고 있다
몸도 마음도 다 말라버려서
비상 먹은 듯, 비상을 먹은 듯
젖은 몸의 호시절은 가고 말았다
무진무진
살아 보겠다고 늦바람 피우지 마라
지빈至貧하면 어떻고 무의無依하면 어떠랴
어차피 세상은 거대한 감옥
너나 나나 의지도 가지도 없는
허공의 사고무친 아니겠느냐
축제는 언제나 텅 빈 마당
파장의 적막이 그립지 않느냐
죽은 새에게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듯
모든 것이 멀리 보이고
너도 이제 멀리 와 있다
세상의 반반한 것들도 어차피 반반이다.
♧ 꽃이 지고 나서야 - 홍해리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너를 보고 싶었다
마음만 마음만 하다
눈멀고 귀먹고
마음이란 것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구나
꽃 지고 나서야
열매를 맺다니
꽃이 피면 뭣 하나
꽃 지면 뭘 해?
♧ 분수噴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만
물은 스스로 분수를 알아
적당한 높이에서
몸을 낮추고
한 송이 꽃을 피우면서 지고 마는
절정의 순간
햇살이 잠시 쉬었다 가고
바람도 옷자락을 흔들어 주고
흰구름이 가만히 손을 얹는다
금빛 꿈이란 늘 허망한 법
촉촉이 젖어 있는 너의 언저리
낭랑낭랑 흐르는 눈물의 반짝
허공에 부서진다.
♧ 억새 날다
웃는 걸까
우는 걸까
웃음이 울음 속으로 들어가고
울음이 웃음 밖으로 나오니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일,
바람 따라 온몸을 흔들면서
때로는 허리 꺾어 몸을 뉘고
산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친다
그 소리에 문뜩 산이 지워진다
굽이치는 것은 은빛 강물 소린가
천파만파 파도치는 소리인가
하늘과 땅이 구분 없이 흔들리고 있다
한여름 우렛소리 어디 가 잠들었다
눈물 마른 꽃잎 사이사이 반짝이고
굽이굽이 지나쳐 우는 듯 웃는 듯
우련우련 드러나는 산그림자
일장춘몽을 깨우고 있는 것인지
추풍낙엽을 쓸고 있는 것인지
울긋불긋 나뭇잎 다들 떠난 자리
바람 불 때마다 억새가 톱니를 갈아
칼날 같은 날개로 날아오르고 있다
희미한 달빛도 몸무게 많이 줄었다.
♧ 길에 대하여
한평생을 길에서 살았다
발바닥에 길이 들었다
가는 길은 공간이고 시간이었다
공간에서 제자리를 가고
시간에선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샛길로 오솔길로 가다
큰길로 한번 나가 보면
이내 뒷길로 골목길로 몰릴 뿐
삶이란 물길이고 불길이었다
허방 천지 끝없는 밤길이었다
살길이 어디인가
갈 길이 없는 세상
길을 잃고 헤매기 몇 번이었던가
꽃길에 바람 불어 꽃잎 다 날리고
도끼 자루는 삭아내렸다
남들은 외길로 지름길로 달려가는데
바람 부는 갈림길에 서 있곤 했다
눈길에 넘어져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빗길에 미끄러져도 손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가는 길에 어쩌다 마주쳐도
길길이 날뛰는 시간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인생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라 했지만
끝내 비단길, 하늘길은 보이지 않았다
날개는 꿈길의 시퍼런 독약이었다.
♧ 입동立冬
온 세상이
빨갛게,
잘
익은 것 보았습니다.
낙엽 깔린 스산한 길,
급하게 달려오는
칼 찬 장군의 말발굽 소리 들리고,
영혼의 밑바닥에
은빛 그리움을 채우고 있는,
흰 이빨 드러낸 나무들
가지마다 꿈을 안고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하늘도
쨍!
소리를 내며
나지막이 걸려 있습니다.
* 洪海里 시집『비밀』 (2010, 우리글)에서
사진 : 어제(11.29) 서귀포 엉또폭포와 고근산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12월호의 시 (0) | 2017.12.07 |
---|---|
'다시, 역류를 꿈꾸다'에서 (0) | 2017.12.05 |
한희정 시집 '그래, 지금은 사랑이야' (0) | 2017.11.28 |
'한라산문학' 제30집의 시와 억새 (0) | 2017.11.26 |
한희정 시선집 '도시의 가을 한 잎' (0) | 2017.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