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한희정 시선집 '도시의 가을 한 잎'

김창집 2017. 11. 24. 10:04



시인의 말

 

미욱한 내 시편들이 경건해지는 순간이다.

 

가지치기를 위해

귤나무 앞에 선 초보 농부처럼

선뜻 쳐내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골라도

거기서 거기

 

그래도 다행이다

졸작들 중에라도 고르기 어려운,

거기서 거기만큼의 시를 쓰면 될는지

 

기회를 주신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01710

한희정

   

 

 

도시의 가을 한 잎

 

  물든 담쟁이 손이 보도블록에 떨어져 있네. 줄줄이 압핀에 눌려 고통의 벽을 넘던 만년의 혈소판 같은 가을 한 잎이 떨어져 있네.

 

  맞은 편 창틀마다 소국 분내 건 걸 보면, 이맘 땐 빌딩조차 단풍들고 싶은가 봐 여름내 무력증 앓던 도시 속의 사람들처럼.

 

  뒤돌아 나부끼는 계절 끝 하얀 손들, 작별을 예감하는 단문형의 메시지 따라

  난감한 내 심중에도 가을 한 잎이 타고 있었네

 


 

 

가을의 합장

 

암자 오르는 길엔 나뭇잎이 합장한다.

산을 향한 기도만큼 연륜도 깊어지신

작은 키 곤줄박이도 그길 위를 따르고

 

갓 서른 초행길엔 바짝바짝 입이 타던

어머니 이름으로 다시 걷는 이 길 위에

어젯밤 가막살 열매가 기도처럼 빨갛다

 

순리대로 사는 것이 때로는 힘이 들다

한발 딛는 자국마다 단풍 곱게 내리시는

저 붉은 가을의 합장 일념으로 타드네.

 



멀구슬 열매

 

애당초 출생부터

 

귀한 손은 아니었지

 

마른 젖꼭지에

 

발그레 물기 돌쯤

 

입춘 녘 정낭을 내리고

 

액막이를

 

또 하나……

 

두이레 밤낮으로

 

사설이 계속됐다

 

추운 가지 끝에

 

딸랑딸랑 요령소리

 

인내한 먹구슬 열매가

 

봄을 먼저

 

기다려……

 


 

 

단풍 한 잎

 

다시 또 이별이네

 

모른 척 뒤돌아섰네

 

와지끈 깨문 입술

 

알기나 하는 듯이

 

황급히

 

절명시 한 줄

 

내 앞에다 홀리네

 


  

 

가을 운문사

 

제 속 다 보이고도 부끄러울 것이 없네

만산홍엽 내달리는 가지산 끝자락에

비구니 늙은 웃음 같은 반시감이 달렸네.

 

몇 밤을 아팠을까 까맣게 탄 홍엽이며

바람이 휘젓다 만 산자락 잉걸불이며

단숨에 산을 내려와 내 속 다시 뒤집던,

 

! 저리 홀가분히 떠나는 자의 모습

선방 앞뜰 은행나무 동안거에 홀로 드는

선승의 독경소리가 처마 끝에 머물러

 

간절했던 자국 따라 돌계단도 다 닳았네

산 오르는 숨소리에 만추낙엽 타는 냄새

사리암 합장한 손이 단풍보다 뜨겁다

 


 

둥지

 

마무리 귤을 따다 빈 둥지를 보았네

선순위 밀리고 밀린 비상품 감귤만한

휑하니 바람 드는 창, 겨울채비 하다 말고

 

이제야 알았네 잎 뒤로 숨은 뜻을

무허가 미등기 삶의 하루가 더딘 시간

노랗게 신맛 삼키며 아른 길을 떴구나

 

전셋값 고공행진 텃새마저 터를 잃은,

면장갑 손끝에서 무심히 잘리는 오후

돌아와 둥지를 틀까 지키고 선 저 하늘.

 

 

 

겨울쑥부쟁이

 

주춤 말을 걸까

그냥 가는 하루가 밉다

 

쪽박 세상인심

울상 한 번 짖지 않는

 

해녀의 막내딸처럼 바다 향해 피었다.

 

 

손 꽁꽁 시린 별이

바위틈에 내려와

 

파도에 한 겹 두 겹

뭔가 자꾸 감추려는

 

명치 끝 아리게 오는 실루엣의 정체는 뭘까

 

 

혼자 그린 눈화장을

혼자 보고 지워야 하는

 

서둘러 눈발 앞에

검정외투 걸치는 바다

 

인정 뚝, 끊긴 바닷가 꽃이 저만 푸르다

 

 

                              * 한희정 시선집 도시의 가을 한 잎

                                 (현대시조 100인 선 89, 고요아침, 20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