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미욱한 내 시편들이 경건해지는 순간이다.
가지치기를 위해
귤나무 앞에 선 초보 농부처럼
선뜻 쳐내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골라도
거기서 거기
그래도 다행이다
졸작들 중에라도 고르기 어려운,
거기서 거기만큼의 시를 쓰면 될는지…
기회를 주신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017년 10월
한희정
♧ 도시의 가을 한 잎
물든 담쟁이 손이 보도블록에 떨어져 있네. 줄줄이 압핀에 눌려 고통의 벽을 넘던 만년의 혈소판 같은 가을 한 잎이 떨어져 있네.
맞은 편 창틀마다 소국 분盆 내 건 걸 보면, 이맘 땐 빌딩조차 단풍들고 싶은가 봐 여름내 무력증 앓던 도시 속의 사람들처럼.
뒤돌아 나부끼는 계절 끝 하얀 손들, 작별을 예감하는 단문형의 메시지 따라
난감한 내 심중에도 가을 한 잎이 타고 있었네
♧ 가을의 합장
암자 오르는 길엔 나뭇잎이 합장한다.
산을 향한 기도만큼 연륜도 깊어지신
작은 키 곤줄박이도 그길 위를 따르고
갓 서른 초행길엔 바짝바짝 입이 타던
어머니 이름으로 다시 걷는 이 길 위에
어젯밤 가막살 열매가 기도처럼 빨갛다
순리대로 사는 것이 때로는 힘이 들다
한발 딛는 자국마다 단풍 곱게 내리시는
저 붉은 가을의 합장 일념으로 타드네.
♧ 멀구슬 열매
애당초 출생부터
귀한 손은 아니었지
마른 젖꼭지에
발그레 물기 돌쯤
입춘 녘 정낭을 내리고
액막이를
또 하나……
두이레 밤낮으로
사설이 계속됐다
추운 가지 끝에
딸랑딸랑 요령소리
인내한 먹구슬 열매가
봄을 먼저
기다려……
♧ 단풍 한 잎
다시 또 이별이네
모른 척 뒤돌아섰네
와지끈 깨문 입술
알기나 하는 듯이
황급히
절명시 한 줄
내 앞에다 홀리네
♧ 가을 운문사
제 속 다 보이고도 부끄러울 것이 없네
만산홍엽 내달리는 가지산 끝자락에
비구니 늙은 웃음 같은 반시감이 달렸네.
몇 밤을 아팠을까 까맣게 탄 홍엽이며
바람이 휘젓다 만 산자락 잉걸불이며
단숨에 산을 내려와 내 속 다시 뒤집던,
아! 저리 홀가분히 떠나는 자의 모습
선방 앞뜰 은행나무 동안거에 홀로 드는
선승의 독경소리가 처마 끝에 머물러
간절했던 자국 따라 돌계단도 다 닳았네
산 오르는 숨소리에 만추낙엽 타는 냄새
사리암 합장한 손이 단풍보다 뜨겁다
♧ 둥지
마무리 귤을 따다 빈 둥지를 보았네
선순위 밀리고 밀린 비상품 감귤만한
휑하니 바람 드는 창, 겨울채비 하다 말고
이제야 알았네 잎 뒤로 숨은 뜻을
무허가 미등기 삶의 하루가 더딘 시간
노랗게 신맛 삼키며 아른 길을 떴구나
전셋값 고공행진 텃새마저 터를 잃은,
면장갑 손끝에서 무심히 잘리는 오후
돌아와 둥지를 틀까 지키고 선 저 하늘.
♧ 겨울쑥부쟁이
주춤 말을 걸까
그냥 가는 하루가 밉다
쪽박 세상인심
울상 한 번 짖지 않는
해녀의 막내딸처럼 바다 향해 피었다.
손 꽁꽁 시린 별이
바위틈에 내려와
파도에 한 겹 두 겹
뭔가 자꾸 감추려는
명치 끝 아리게 오는 실루엣의 정체는 뭘까
혼자 그린 눈화장을
혼자 보고 지워야 하는
서둘러 눈발 앞에
검정외투 걸치는 바다
인정 뚝, 끊긴 바닷가 꽃이 저만 푸르다
* 한희정 시선집 ‘도시의 가을 한 잎’
(현대시조 100인 선 89, 고요아침,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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