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겨울호의 시

김창집 2017. 12. 9. 10:03


제주작가회의에서 발행하는 문학지

제주작가’ 2017년 겨울호(통권 59)

나왔다.

 

특집 1대학생 소설 창작의 현장

특집 2나의 아버지

회원들의 시와 시조,

단편소설과 동화,

수필과 인터뷰,

다른 나라의 작품을 소개하는 공감과 연대’,

길 따라 떠나는 김광렬의 제주 기행,

문무병의 몽골 신화기행첫 번째,

그 외 사이의 기고,

장영주의 연재평론, 서평과

끝에 2017 제주작가 신인상 발표와

수상작(고영숙)을 실었다.

 

 

  

만월滿月 - 김경훈

 

집착은 미련을 낳고

미련은 한낱 욕심

욕심은 한갓 빈 손

 

이그러지는 눈 돌려

문득 하늘 보니

,

 

스스로 몸을 비워 이우는

만월이여

무욕의 꽃이여

 

비었으되 차오르고

기득하면 덜어내는

상처투성이 해탈이여

 


 

 

수평선 - 김병택

 

수평선은 조금씩 자랐다.

비 내리고 바람 불어

꿈이 어지럽게 흔들리면

수평선도 함께 흔들렸다.

 

내 의식이 향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수평선이었다.

 

처음으로 집을 뛰쳐나와

험한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

정신의 고통을 참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을 때

유일하게 내게 다가온 존재도

수평선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수평선은

자라지 않는다.

꿈이 미세하게 흔들리면

함께 흔들리긴 해도

다른 움직임은 보여주지 않는다.

 


 

 

시치미 - 김성주

 

폭염경보가 울린다

나는 진즉 방바닥에 엎드려 대피 중이다

후드득 지붕 위를 지나는 발자국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 본다

여우가 토란잎을 훑고 사라진다

토란잎 그 진초록 세계의 중심에 강낭콩 알만 한 물방울

여우가 물어다 놓은 투명한 영혼

거구의 하늘이 작고 말랑말랑한 젖꼭지 속으로 쏙 빨려든다

격렬한 연애로 초록 침대가 살짝 흔들렸던가

연인을 납치해 간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싱싱하게 푸르다

저 시치미, 내게도 있다

우리는 말 잔등에 올라 신나게 질주했다

푸른 초원을 지나 밀림을 지나 계곡을 지나 우주 끝까지

--

꽃이 피고 새들이 날고 물결 일렁이고 별이 반짝였다

--

폭죽 터지듯 창조된 나의 우주, 나의 시치미

다시 폭염경보를 알리는 소리

땀에 젖은 이마의 주름경전 어디에도

피서지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 푸른 우주의 중심에 들어

폭염을 견디는 것이다

 


 

 

방법 - 김수열

 

어린 시절 유독 개씹이 잦았다

어머닌 무명천으로 가리개를 만들었지만

개씹 때문에 창피했고

가리개 때문에 더 맘 상했다

-아이고아이고 개씹닜져

-아이고아이고 애꾸됐져

사내아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얼레리꼴레리 개씹타령을 했다

 

그런 날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호롱에 달군 이불 바농을

어린 속눈썹에 갖다 대고는

-할마님아 철 어신 아이우다

-할마님아 분시 어신 아이우다

눈썹 주변을 콕콕 찌르는 시늉하며

불러도 오지 않을 삼승할망을 찾았다

 

문득 발바닥이 간지러워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발바닥 양쪽에 검은 먹글씨로

선명하게 새겨놓고 있었다

 

天平

地平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 김순선

 

고향이 있으면서도

고향이 없는 사람

고향에 살면서도

모든 게 낯설어

 

서쪽을 향해 달려가도

동쪽을 향해 길을 떠나도

산도 바다도 이국 땅

나는 관광객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은 아득하여

구름이 지나가면 옛 소식을 묻고

바람이 불면 귀를 여는

나는 작은 연못에

부평초

 


 

어떤 이력 - 김승립

 

국민학교 시절

사친회비 못낸 아이들을 행정직원이 호명했다

담임은 반장마저 안 내어 학급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기 얼굴에 먹칠했다며 좆나게 두드려 팼다

그리고는 정신이 썩었다며 국민교육헌장을 백 번 낭송하게 했다

 

중학교 시절

힘센 급우에게 막무가내로 코피 나게 얻어터졌다

녀석의 되도 않은 욕설에 반발했다는 것이다

퉁퉁 부은 얼굴로 교무실에 불려가 자초지종을 진술했으나

어떤 선생님도 녀석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그냥 침묵했다

녀석의 애비가 중정 대공분실 간부라나 뭐라나

 

고등학교 시절

갑작스레 유신이 선포되고

그냥 민주주의와 한국적 민주주의가 왜 이렇게 다르냐고 질문했다가

서울대 나왔다는 일반사회 교사에게 반국민으로 찍혔다

일 년 내내 수업시간만 되면 주인의식 없는 놈이라고

손님은 수업 받을 자격도 없다고 무지 욕을 해댔다


대학 시절

현역 해병대 장교가 지휘하는 군사교육 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무리하게 교육 강행하는 데 반발하여

수업거부 선동하였다가 교련반대 데모자로 찍혀

기관에 여러 차례 조사 받고 사상을 증명해야만 했다

 

참으로 숨 막히게 찌질한 이력을 갖고 이 사회에서

아직도 부끄러움 씹으며 그냥저냥 먹고살고 있다

코흘리개 꼬마가 민국의 정규교육과정을 거쳐

사회에 발을 내딛을 때까지 그 긴 이력 동안

대통령은 군인 출신 박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줄곧 통치했다

 

 

                      *제주작가2017년 겨울호(통권 59)에서

                           사진 : 요즘 한창 열매 색이 짙어진 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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