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여기에 실린 시들은 다른 누군가 쓴 것 같다.
시집으로 엮으려고 정리하다 보니
내 안에 이런 마음들이 부스럭거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참 불편했었다.
허나, 내 안의 못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다른 누군가도 넓게는 나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시들은
내가 아파하며 낳은 자식들임이 분명하다.
2017년 겨울, 제주에서
김광렬
♧ 핵꽃
수천수만 수억의 꽃잎들이
한 묶음 꽃다발로 피어나는
저것은 꽃이 아니다
그냥 무심히 보면
그저 황홀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 버섯구름 같은 꽃
나비도 잘못 앉았다가는 피 묻는
사람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저것은 독 묻은 꽃이다
살상무기다, 텔레비전에서
핵실험 영상을 보면서
저것은 독 묻은 꽃이 아니라
살인무기가 아니라
진짜 꽃이었으면 할 때
너의 생각이 참 한심하다며
무슨 천 조각처럼
조각조각 스스로를 찢어내다가
잿더미로 흩날리는 핵(核) 꽃,
그 안에 숨은 고집이 무섭다
♧ 상처 없이 피는 꽃은 없다
옛 시절 바닷가 어느 호젓한 마을에서 전복을 먹다가
딱딱한 것이 씹혀 뱉은 일이 있다
진주였다
상처 난 전복이 진주를 만든다 했던가!
하얀 것이, 하얀 바탕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그것이
나무의 옹이처럼 한 목숨의 상처였다니
상처가 이리 아름답다니
상처가 이리 광휘로운 속삭임이어도 된다니,
처음 나는 나주 작은 돌을 씹은 줄 알았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뒤 진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안에 상처를 품고 자라난다는 것을 되새겼을 때
나는 상처를 사랑하기로 했다
상처 없이 피는 꽃은 없다
♧ 전쟁과 평화
나의 살을 떼어주고
너의 뼈를 얻을 것인가
너의 살을 베어내고
나의 뼈를 내줄 것인가
아니면, 너와 나의 살과 뼈가
모두 안녕하도록
평화롭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 사랑과 평화
-전쟁 영화를 보며
늦은 밤 전쟁터에 꽃 피는 사랑 이야기를
넋 놓고 하염없이 따라가다가
나도 저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하기도 하다가
아니, 그것이 아무리 검붉고 애잔한 사랑이어도
수많은 목숨들 빼앗아가는 전쟁은 안 된다고
차라리 검은 그림자 일렁이는 불안한 평화가 낫다고
책장 넘기듯 한 장 한 장 장면을 넘길 때
살육은 이렇게 아픈 거라며
뚝, 떨어지는 창가 화분의 붉은 꽃잎 한 장
♧ 부끄러움이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
커피가 니그로의 눈물이라면
사막이 낙타의 고통이라면
촛농이 대한민국의 아픔이라면
바람은 제주의 한숨
나는 여태껏 니그로의 눈물을 마셔왔고
얼마 전에는 사막의 낙타를 탔었고
지금은 제주시청 앞에서 촛불을 켜 들었고
아주 오래전부터 제주의 한숨 속에 살아왔다
몰랐다, 나는
내가 마신 커피가 채찍의 발자국이었다는 것을
내가 탔던 낙타가 고통으로 뭉쳐진 고름 덩이었다는 것을
내가 켠 촛불이 사람들의 찢긴 가슴이라는 것을
내가 호흡한 바람이 눈물로 범벅된 한숨이었다는 것을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
통증은 잎사귀에 잠시몸살 앓다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 여겼을 뿐,
이제 부끄러움이
못 견디게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
♧ 꽃 피는 봄날에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드디어 꺼내 드는 말처럼
멈칫멈칫
손가락 펼쳐 드는 봄꽃들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 건넸으면
핵이
사드가
공포로 자라나는 이 땅에
사랑한다는 말이
그 위를 하얗게 덮었으면
파릇파릇하게 물들었으면
꽃 피는 봄날이
왜 이리 우중충한가,
핵 사드 다 버리고
서슴없이 다가가
서로 힘껏 껴안았으면
*김광렬 시집 『내일은 무지개』(푸른사상 시선 83, 2017)에서
사진 : 한라산의 겨우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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