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광렬 시집 '내일은 무지개'에서

김창집 2017. 12. 11. 12:14


시인의 말

 

 

  여기에 실린 시들은 다른 누군가 쓴 것 같다.

  시집으로 엮으려고 정리하다 보니

  내 안에 이런 마음들이 부스럭거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참 불편했었다.

  허나, 내 안의 못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다른 누군가도 넓게는 나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시들은

  내가 아파하며 낳은 자식들임이 분명하다.

 

 

                             2017년 겨울, 제주에서

                                                   김광렬

   

 

핵꽃

 

수천수만 수억의 꽃잎들이

한 묶음 꽃다발로 피어나는

저것은 꽃이 아니다

그냥 무심히 보면

그저 황홀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 버섯구름 같은 꽃

나비도 잘못 앉았다가는 피 묻는

사람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저것은 독 묻은 꽃이다

살상무기다, 텔레비전에서

핵실험 영상을 보면서

저것은 독 묻은 꽃이 아니라

살인무기가 아니라

진짜 꽃이었으면 할 때

너의 생각이 참 한심하다며

무슨 천 조각처럼

조각조각 스스로를 찢어내다가

잿더미로 흩날리는 핵() ,

그 안에 숨은 고집이 무섭다

   

 

 

상처 없이 피는 꽃은 없다

 

옛 시절 바닷가 어느 호젓한 마을에서 전복을 먹다가

딱딱한 것이 씹혀 뱉은 일이 있다

진주였다

상처 난 전복이 진주를 만든다 했던가!

하얀 것이, 하얀 바탕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그것이

나무의 옹이처럼 한 목숨의 상처였다니

상처가 이리 아름답다니

상처가 이리 광휘로운 속삭임이어도 된다니,

처음 나는 나주 작은 돌을 씹은 줄 알았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뒤 진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안에 상처를 품고 자라난다는 것을 되새겼을 때

나는 상처를 사랑하기로 했다

상처 없이 피는 꽃은 없다

 

 

 

전쟁과 평화

 

나의 살을 떼어주고

너의 뼈를 얻을 것인가

너의 살을 베어내고

나의 뼈를 내줄 것인가

아니면, 너와 나의 살과 뼈가

모두 안녕하도록

평화롭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사랑과 평화

    -전쟁 영화를 보며

 

늦은 밤 전쟁터에 꽃 피는 사랑 이야기를

넋 놓고 하염없이 따라가다가

나도 저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하기도 하다가

아니, 그것이 아무리 검붉고 애잔한 사랑이어도

수많은 목숨들 빼앗아가는 전쟁은 안 된다고

차라리 검은 그림자 일렁이는 불안한 평화가 낫다고

책장 넘기듯 한 장 한 장 장면을 넘길 때

살육은 이렇게 아픈 거라며

, 떨어지는 창가 화분의 붉은 꽃잎 한 장

   

 

 

부끄러움이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

 

커피가 니그로의 눈물이라면

사막이 낙타의 고통이라면

촛농이 대한민국의 아픔이라면

바람은 제주의 한숨

 

나는 여태껏 니그로의 눈물을 마셔왔고

얼마 전에는 사막의 낙타를 탔었고

지금은 제주시청 앞에서 촛불을 켜 들었고

아주 오래전부터 제주의 한숨 속에 살아왔다

 

몰랐다, 나는

 

내가 마신 커피가 채찍의 발자국이었다는 것을

내가 탔던 낙타가 고통으로 뭉쳐진 고름 덩이었다는 것을

내가 켠 촛불이 사람들의 찢긴 가슴이라는 것을

내가 호흡한 바람이 눈물로 범벅된 한숨이었다는 것을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

통증은 잎사귀에 잠시몸살 앓다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 여겼을 뿐,

 

이제 부끄러움이

못 견디게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

   

 

 

꽃 피는 봄날에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드디어 꺼내 드는 말처럼

 

멈칫멈칫

손가락 펼쳐 드는 봄꽃들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 건넸으면

 

핵이

사드가

공포로 자라나는 이 땅에

 

사랑한다는 말이

그 위를 하얗게 덮었으면

파릇파릇하게 물들었으면

 

꽃 피는 봄날이

왜 이리 우중충한가,

 

핵 사드 다 버리고

서슴없이 다가가

서로 힘껏 껴안았으면

 

 

                   *김광렬 시집 내일은 무지개(푸른사상 시선 83, 2017)에서

                                         사진 : 한라산의 겨우살이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인수 시집 '섬과 섬 사이'의 '해녀'   (0) 2017.12.18
'우리詩' 12월호의 시(2)  (0) 2017.12.14
'제주작가' 겨울호의 시  (0) 2017.12.09
'우리詩' 12월호의 시  (0) 2017.12.07
'다시, 역류를 꿈꾸다'에서  (0) 2017.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