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심한 봄날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236
흘러가라, 물!
고여 있으면 썩는다.
바람아!
구멍을 만나 피리를 불어라.
울지 않으면 죽는다.
돌멩이도 취해서
애를 배는 봄인데,
아내여!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 무모한 열정에 대하여 - 신단향
-상록객잔
눈보라를 헤치며 객잔을 성큼 들어오는 검은 옷의 사내, 그는 옆구리에 부러진 장미 칼을 차고 있다. 상록객잔 마녀의 요색한 방에, 볼품없는 헛기침이 새어 나온다.
함박눈이 치맛자락을 너풀대며 지붕과 지붕 위를 건너뛰는 골목엔 사람들이 어깨를 웅크리고 지나가는데 숫돌에 정성스레 간 식도를 들고 사내와 맞대결하는 동안, 사내의 눈빛은 점점 게슴츠레해지고 내 발가락은 저려온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칼과 칼이 부딪혀 불똥이 번쩍이는 잔엔 서로의 밧줄이 팽팽하다. 쉴 새 없이 휘두르는 사내의 칼놀림엔 졸음만 올 뿐, 내려앉은 눈꺼풀 밖으로 바람이 흥얼거린다.
눈은 그쳤고 골목은 사나운 빙판으로 변해간다. 사내의 술잔에 슬그머니 매혹의 미소와 비아그라 한 알 들어간다. 일어나라. 무사여. 밖에는 눈이 다시 오고 마녀의 칼끝은 사혈을 보고 있다.
비수에 꽂힌 사내의 젖은 눈이 몽롱하다.
♧ 북 -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 낮술 - 김수열
인생에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비 내리는 낮술을 안다
살아도 살아도 삶이 내게 오지 않을 때
벗이 있어도 낯설게만 느껴질 때
나와 내가 마주 앉아 쓸쓸한
눈물 한 잔 따르는
그 뜨거움
♧ 진주와 조개 - 한인철
어쩌자고 조개가 되어버린 것일까
키워 앓다
세상 밖에 진주를 내놓으면
뒤돌아보지 않은 아랑곳 세상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황홀경에 살라며
조개가 조개를 낳지 않고
진주를 꿈꾼 대업
한 알의 영롱한 빛살을 삭히려
억만 번 파도가 스칠 때마다
소명이듯 살아야 살려내는 고통
감내의 입을 굳게 다문다
피가 통하지 않으면 사라지느니
진주를 속살에 품어
파도에 쫒길 때마다
조개들이 쉴 곳은 늘 모래 속인 걸.
♧ 억지를 부리면 안 되는 일 있다 - 김완
억지를 부리면 안 되는 일 있다 남에게
부담스러운 일 억지로 떠넘기면 안 된다
상황논리에 빠져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상대에게 싫어하는 일 강요하는 경우 있다
깊게 생각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내세운다
싫다고 표현해도 그들은 그것을
강한 거절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하다
칼로 무 베듯이 단호한 문법을 사용해야 하나
시골스러운 나는 도시인다운 그런 세련된
거절의 표현을 배우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일을 망치고 오늘밤 잠들지 못해 뒤척인다
살다보면 억지를 부리면 안 되는 일 있다
♧ 끝내 붉음에 젖다가 - 김혜숙
만산홍엽滿山紅葉 산과 들은
훨훨 불 지피며 흥타령 부르다
끝내는 헐거운 잇몸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웃음 흘리다
홀로 멋쩍어 외로움이 된다
깎아 내리는 산 아래 강물도
낙화를 받아내며 윗물 아랫물
온종일 바꾸며 훔쳐내고
오래지 않아 낡아 깁고 있던
누더기 옷 한 벌 헐벗은 몸에
두르고 끝 줄 타고 가는 날이
저기 온다.
♧ 홍어 - 윤순호
눈밭이 키운 파란 보리 싹이
홍어 속과 바글바글 끓고 있는 주점,
알싸하게 쏘는 삼합이
콧등 시큰한 누님의 잔칫날을 일깨운다
다가온 혼례가
차일遮日에 소문을 내걸고
자분자분 홍어를 발기는 어머니
“아무튼지 시댁 가풍을 잘 따라야 혀!”
등을 땋아 내려온
빨갛게 설렌 꽃 댕기 앞에
낯설게 다가오는 시집살이들이
도마 위에 토막토막 나뒹굴었다
어미 품을 떠나는 아린 손가락 하나가
“엄니 간이 어쩐가?”
차마 젖은 눈시울로
조물조물 마지막 손맛을 버무리고
발버둥 치는 돼지 멱 위로
흰 눈이 펑펑 울었다
*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12월호(통권 354)에서
* 사진 :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 중인 낙상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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