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잠깐,
천지간이 기우뚱거렸다
폭설에 묻힌 산허리 어디쯤에
꼼지락거리는
복수초 꽃잎 한 점
꽁꽁 언 땅을 가만히 녹이고 있었으리
햇살 톡톡 터트리며 오시는 봄을 따라온
새 생명의 이름
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 원준에게
손과 발을 새로 얻었습니다
콩닥거리는 작은 심장도 하나 더 생겼습니다
아비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섬에서
소리 없는 너울에 실린 몸처럼 가끔씩 기우뚱거리던
세상의 중심도 한순간에 반듯해졌습니다
시공의 경계를 단숨에 건너
이제 막 돌아온 작은 생명 하나로
마침내 한 家系가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습니다
♧ 오동나무 집 한 채
평생 가난해서였다는데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넓은 어깨, 무늬 좋은 나이테가 촘촘한
육신을 지니고도
정작 당신을 위해선 앉은뱅이책상 하나 장만하지 않았던 사내
목청 울리지 않고 산 세월을 남기고
끝내 돌아선 밤
곡哭 없는 새벽 3시의 영안실엔 아직
촛불조차 켜지지 않았는데
단단했던 근육을 스스로 허물고
깊은 잠에 빠진 당신을 위한
마지막 선물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을
마지막 거처
오동나무 집 한 채 고르는 밤
♧ 아버지
이제 놓아줄 때가 되었다
그만 미워해라
곰곰 생각해보면 아들이 자라 아버지가 되고
자손들 오뉴월 버드나무 가지처럼 뻗어가는 기쁨을
다 누려보지 못했으니 불상한 양반 아니냐
겨우 세 살 먹은 너를 두고
요절한 네 아비는 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미워한 적은 없었지만 원망은 몇 번 했고
살아오는 동안 가끔씩 그리웠을 뿐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면 착한 아들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은 당신 때문에
삶과 불화한 세월이 길었다
내 몸에 깃든 사소한 버릇까지 죄다 당신을 닮았다는데
이제 나를 미워하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 비양도
하귀에서 애월까지 구비진 길을 지나
하얀 이 드러낸 어부의 웃음이
생선 비늘처럼 활짝 날리는
한림항도 지나
가슴 찔리기 좋은 각도에 멈춰선 노을 앞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만날 수 없어서 더 애틋한
사랑 하나쯤 있어도 좋겠지
평생 그리워만 해도 좋을
그런 섬 하나 남겨두어도 좋겠지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고
끝내 다다르지 못해도 좋은
촉수 낮은 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까지
지켜보다 그냥 돌아서도 좋은
♧ 애월
여긴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야
다녀간 열에 다섯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들려
헤어진 이들이 뱉어낸 탄식이 쌓여 더 푸르러진
그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 뉘우치고 있는 중
긴 머리 풀어헤친 채 둥둥, 겨울 파도 위에 떠오른
여인을 기억해
구급차는 경적을 죽인 채 응답 없는 신호만 바다로 보내고 있었지
달빛이 자꾸 손에서 빠져나가 잡히지 않자
스스로 달이 되려 했다는데 그건 그냥 소문일지 몰라
포구는 배를 띄워본 지 오래,
작은 배 몇 척 눈물 같은 실금으로 몸이 갈라지고 있어
사랑은 그렇게 낡아가고
모든 약속도 끝내는 금이 가지
절벽은 죽은 이들을 위한 처소
그러니 나 없이 돌아온 당신은
이 바다 위에 뜬 달빛을 붙잡으려 하지 마라
애월은,
애월바다는 그냥 담담하게 바라만 봐
부디 이 깊고 푸른 물빛에 마음 뺏기지 마
♧ 사랑이여, 안녕
이것은 흐린 날의 이야기다
수국이 활짝 폈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
잘 지낼 것이라는 다짐만 나누고 떠나온 날의 기억이다
헤어지면서 손을 한 번 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앉지만
돌아오는 길이 어두워져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어둔 방에 숨어들어 깊게 금 간 심장을 꺼내
한 땀 한 땀 기워내던 밤
상처가 아무는데 십 년쯤 걸리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씻었다
이제 입과 귀를 닫아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는지를
다시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계절이므로
이 정도는 헤아려 주리라 생각할 뿐
그러므로 예의 바른 사랑이여 안녕
십 년 후에도 안녕
*이종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삶창시선 50, 2017)에서
*사진 : 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는 콩짜개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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