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종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2)

김창집 2018. 1. 25. 23:44



생명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잠깐,

천지간이 기우뚱거렸다

 

폭설에 묻힌 산허리 어디쯤에

꼼지락거리는

복수초 꽃잎 한 점

꽁꽁 언 땅을 가만히 녹이고 있었으리

 

햇살 톡톡 터트리며 오시는 봄을 따라온

새 생명의 이름

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원준에게

 

손과 발을 새로 얻었습니다

콩닥거리는 작은 심장도 하나 더 생겼습니다

 

아비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섬에서

소리 없는 너울에 실린 몸처럼 가끔씩 기우뚱거리던

세상의 중심도 한순간에 반듯해졌습니다

 

시공의 경계를 단숨에 건너

이제 막 돌아온 작은 생명 하나로

마침내 한 家系가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습니다

   

 

 

오동나무 집 한 채

 

평생 가난해서였다는데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넓은 어깨, 무늬 좋은 나이테가 촘촘한

육신을 지니고도

정작 당신을 위해선 앉은뱅이책상 하나 장만하지 않았던 사내

목청 울리지 않고 산 세월을 남기고

끝내 돌아선 밤

없는 새벽 3시의 영안실엔 아직

촛불조차 켜지지 않았는데

 

단단했던 근육을 스스로 허물고

깊은 잠에 빠진 당신을 위한

마지막 선물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을

마지막 거처

오동나무 집 한 채 고르는 밤

   

 

 

아버지

 

이제 놓아줄 때가 되었다

그만 미워해라

곰곰 생각해보면 아들이 자라 아버지가 되고

자손들 오뉴월 버드나무 가지처럼 뻗어가는 기쁨을

다 누려보지 못했으니 불상한 양반 아니냐

겨우 세 살 먹은 너를 두고

요절한 네 아비는 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미워한 적은 없었지만 원망은 몇 번 했고

살아오는 동안 가끔씩 그리웠을 뿐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면 착한 아들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은 당신 때문에

삶과 불화한 세월이 길었다

 

내 몸에 깃든 사소한 버릇까지 죄다 당신을 닮았다는데

이제 나를 미워하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비양도

 

하귀에서 애월까지 구비진 길을 지나

하얀 이 드러낸 어부의 웃음이

생선 비늘처럼 활짝 날리는

한림항도 지나

가슴 찔리기 좋은 각도에 멈춰선 노을 앞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만날 수 없어서 더 애틋한

사랑 하나쯤 있어도 좋겠지

 

평생 그리워만 해도 좋을

그런 섬 하나 남겨두어도 좋겠지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고

끝내 다다르지 못해도 좋은

촉수 낮은 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까지

지켜보다 그냥 돌아서도 좋은

   

 

 

애월

 

여긴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야

다녀간 열에 다섯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들려

 

헤어진 이들이 뱉어낸 탄식이 쌓여 더 푸르러진

그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 뉘우치고 있는 중

 

긴 머리 풀어헤친 채 둥둥, 겨울 파도 위에 떠오른

여인을 기억해

구급차는 경적을 죽인 채 응답 없는 신호만 바다로 보내고 있었지

달빛이 자꾸 손에서 빠져나가 잡히지 않자

스스로 달이 되려 했다는데 그건 그냥 소문일지 몰라

 

포구는 배를 띄워본 지 오래,

작은 배 몇 척 눈물 같은 실금으로 몸이 갈라지고 있어

사랑은 그렇게 낡아가고

모든 약속도 끝내는 금이 가지

 

절벽은 죽은 이들을 위한 처소

그러니 나 없이 돌아온 당신은

이 바다 위에 뜬 달빛을 붙잡으려 하지 마라

 

애월은,

애월바다는 그냥 담담하게 바라만 봐

부디 이 깊고 푸른 물빛에 마음 뺏기지 마

   

 

 

사랑이여, 안녕

 

이것은 흐린 날의 이야기다

수국이 활짝 폈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

잘 지낼 것이라는 다짐만 나누고 떠나온 날의 기억이다

 

헤어지면서 손을 한 번 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앉지만

돌아오는 길이 어두워져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어둔 방에 숨어들어 깊게 금 간 심장을 꺼내

한 땀 한 땀 기워내던 밤

상처가 아무는데 십 년쯤 걸리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씻었다

 

이제 입과 귀를 닫아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는지를

다시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계절이므로

이 정도는 헤아려 주리라 생각할 뿐

그러므로 예의 바른 사랑이여 안녕

십 년 후에도 안녕



          *이종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삶창시선 50, 2017)에서

                     *사진 : 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는 콩짜개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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