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란 - 장유정
겉모습으로 너를 짐작하긴 어렵다
몇 년을 지켜봐야 알 수 있는
백사십 개의 또 다른 이름이 변경선을 지난다
숫자로 불리거나 서양식으로 불리거나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언제 돌변할지 예측 불가능
까닭 없이 강해지고 약해질 때
누구든 부를 수 있어
가볍고 약하고 투명하게
매 순간 태어나는 이름
심해로 들어갔다 고립된 섬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름
예정일보다 빠르게 몸까지 푸는 이름
가까스로 해상을 지나 빠져나갔다고 밝히는 기록들
어떤 분노와 배신감에 전화가 끊어지고
그래도 하염없이 받을 때까지 걸어본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낯설고 차가운 이름
마음이 켜지는 이름
바람이 묻어 있다 날아가는 그 이름.
♧ 지금이라는 생애 - 한인철
아득히 먼 옛날에 뿌린 그 알갱이가 움을 튼 후로
현실의 바탕에 그 과실을 내밀었다
이 순간 눈앞에 이 광경조차도 새 알갱이 선상에서
훗날에 새 메아리이리라
길을 걸으며 고함을 쳐봐 그리고 메아리를 들춰봐
생각은 같아도
모습이 다름 같이 스치는 여건에 변화는 무쌍한 것
어떤 모습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때의 지금에 이를 때면 들인 공을 품삯 타는 날
세상살이는 큰 산에 돌개울처럼
지금으로 졸졸 흘러들어 가리
지금이 그렇다고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 같지는 않아
삶의 고비마다 눈이 있고, 입이 있고,
의지의 힘도 있을 테니까.
산을 품은 하늘이시여 산을 마르지 않게 하시고
산의 가슴이 돌개울인 걸 바로 알게 하소서.
♧ 사과를 깎으며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290
햇볕이 내려와 얼마나 핥아 주었으면
이리 붉을까
바람이 와서 얼마나 쓰다듬었으면
이리 반짝일까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주물렀으면
이리 둥글까
환한 가을날에는
배도 부르고 하늘도 참 고와서
내 사랑, 무장무장,
이렇게 눈멀고 귀먹어도 되는가 몰라라
이런 날, 스담스담,
아내 손잡고 과수원 길이라도 걸으련만.
♧ 빈집 - 방수영
아무 일 없어 서러운 날이 있다
낮잠 자고 일어난 저녁
엄마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어른 옷을 입은
어린 내가
눈물도 없이
울고 있다
♧ 고통의 끝 - 신덕자
어느 누구에게나
영원히 고통만 주어지진 않을 것
그 고통의 고름이 마침내 터져
나오고서야 새살은 돋아나듯이
작열하는 태양 빛 어느덧 스러지고
평온한 가을빛이 들판 위로 스며들듯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 소리 들리듯이
마음속에 한 줄기 소망의 빛
잃지 않는다면
그 고통 또한 시간 속으로
지나가 버릴 것이다.
♧ 너와 나 - 노희정
바위로 만나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된다 해도
바람으로 날아가지만 않는다면…
♧ 와온에서 - 배소희
장뚱어탕을 먹으면
몸속으로 와온이 들어왔다
물 빠진 속살 위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돌 틈에서
칠면초 질긴 잎 사이로
게걸음치는 장뚱어들
문득
깊은 늑골아래
빗장 걸어 둔 기억이
그물에 걸려 수면 위로 어룽거리고
그 위로
와온 마을이 길게 눕는다
♧ 능쟁이 - 박도신
늦가을 나그네 능쟁이가
갯벌에 길을 내고 있다
숨은 파도를 따라 물결을 타며
무너진 길을 잇고 또 이어간다
너울이 밀려오면 갯바위로 올라서고
센바람의 날갯짓은 마음에 데려다 앉히고
핑계와 변명이 침몰하는
모래 언덕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삶의 의미는 사는 것으로
죽음의 의미는 죽는 것으로
윤슬의 바다
햇살 조는 백사장에서
생각 잃은 날은
능쟁이 따라 길을 걷는다.
* 월간『우리詩』2018년 6월호(통권360호)에서
* 사진 : 요즘 한창인 ‘병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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