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은
백두대간을 최초로 종주한,
1970년대 부산지역 산악계의 전설,
1977년 설악산 토왕성 빙폭氷瀑을 등반하고,
1982년 부산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 등반대장을 맡았다.
1990년에는 백두대간 연작시 60여 편을 월간 ‘사람과 산’에 연재
산악시山岳詩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산악운동의 문화적 위상을 높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업적이 너무 많아 여기 소개하기에 부담이 있어 생략하거니와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인터넷 검색을 권한다.
여기 옮긴 시는 지리산을 노래한
권경업 시집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의 ‘서시’이며,
어느 해 여름엔가 지리산 종주 때 찍은 사진과 같이 올린다.
[서시]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 - 권경업
다녀오면 다들 어김없이 열병을 앓는다.
골마다 영마다 시도 때도 없는 바람 속에서
살아서 뜨거웠던 것들, 뜨거워
스스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것들
뜨겁게 젊음을 사르고 가끔은 목숨까지도 살라
스스럼없이 바람이 된, 지리산에서는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한 사랑의 한부분이 되었을 뿐
언제나, 뜨거웠던 사랑과 뜨거웠던 이별
바람 속 전설이 되어 살아있기에
살다보면 식어버린 가슴에, 문득
뜨거움이 그립고 뜨거운 영혼들이 그립고
뜨겁게 나눌 소주가 그립다던
벽장 속 색 바랜 배낭 찾아 매고 지리산으로 가자
세상의 도린곁 무제치기 아래
부은 발목 야윈 종아리 쓰리게 담그고 있는
빨치산 소년병 외팔이 하씨를 만나고
펄펄 들끓다가, 이현상과 함께 재가 되어버린
갈참나무 숲의 숱한 젊음들과 만나고
쫓고 쫓기고 붙잡히고 붙잡던, 마디마디
화랑담배 연기처럼 하얗게 사라진
백골의 오른 손과 왼손
불쌍한 조국 가여운 겨레의 슬픔을 온 몸으로 맞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라던
의로운 이 차일혁의 토벌대도 만나고
이 산 저 산 축지법으로 넘나들다가
써레봉 솔수펑의 전설 속으로 사라진
마지막 도인道人 허우천도 만나고
젊은 날의 연서戀書 같은 함박꽃잎 텐트 앞에 쌓일 때
에델리드 쟈일보다 질긴 제 명줄 사려서 지고
훌훌, 설산雪山 너머로 가버린 악우岳友 배종순도 만나고
한 줄기 백두대간이라며 아득한 북녘을 향해
서리 내린 천왕봉 여린 첫발을 내딛던
꽃다운 산처녀 남난희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다시 한 줄기 바람이 되고 싶어
뜨겁게 바람이 되고 싶은 날
배낭 속, 소주병 부딪는 소리
하도 맑은 어느 영혼들의 울림 같아서
조개골 갈매숲 숲머리가 먼저 취하고
칠월 염천에도 목이 시린 쑥밭재 잿마루
잔별이 스러질 때쯤
사르려다 사르려다, 식어버린 열정
끝내 사르지 못한다면, 후회 없이
새벽 찬바람에 날려 보내도 괜찮을
사랑한다는 말로 평생을 불러도 모자랄 것만 같은
올라도 올라도 다 오르지 못할 멧부리
한눈에 다 보지 못한다면 다른 이를 위해 남겨둘
중봉, 하봉, 왕등재, 부르지 않아도 달려올 웅석봉
늘, 산 닮은 이들 먼저 떠나보낸 뒤
가을 속에 퍼질러 앉아 기다림에 익숙한 취밭목
산중이라고 왜, 슬픔이 없을까마는
장당골 단풍이 노을처럼 물들 때면, 차마
그 이름들 목 놓아 부를 수 없다
가여운 그 영혼들 위해 그저 침묵해야 할 뿐
가끔씩 산짐승들 내려와 묵정밭을 파 뒤집는
이젠 세월 지켜줄 아이 하나 없는 신밭골
골로 보내라는 한마디에 맺힌 한이 너무 무거워
60년이 지나도록 잠들지 못하는,
이제는 설로 미워하지 말라며
무리무리, 어깨동무로 오르고 있는
중봉 오름길 물자작 숲에서는, 감히
누구도, 아름답다 말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마시다가 남은 소주라도 있다면, 소주처럼
지독하게 맑고 뜨겁게 살라던 그 영혼들 위로하자
비틀거리며 늙어가는 저자거리의 불쌍한 육신
버리지 못하는 욕망, 바리바리
집착의 부피만큼 등짐지고 올라온 우리를 향해
비울수록 울림은 더욱 크다며 대원사 저녁 범종소리
그저, 가슴 텅 비우고 내려가라
도로 내려가라, 내려가라고 타이르는
저녁 눈발 드세지는 어스름의 그곳에서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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