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안은주 시집 '오류의 정원'

김창집 2018. 9. 7. 17:53


시인의 말

  

달을 보니 내일도 덥겠다.

사라지지 않는 꿈을 꾼다.

섬에서 멀미가 심해지고 있다.

 

                      20188

                             안은주

   

 

 

묘묘(渺渺)

 

시간의 변절을 용서하지 못한 채

나는 위로받기로 한다

 

갈변의 빠른 풋사과같이

온종일 재난방송에 마음이 들썩인다

 

가뭄 끝에 온 국지성 폭우는 어느 쪽에서 온 걸까

그날, 그날 과했던 마음의 서늘함을 추스른다

 

기댈 어깨가 부족했다

무엇에 관한, 무엇을 위한 용서인가

 

시간 속에 살 수 없음을 안다

가장 멀리 있는 우주에서

말로 프런티어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횡단 중이다

여기는 소행성 Q212지역

   

   

와락 젖어

 

  변덕스러운 달 아래에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줄리엣이 말했다지. 봄만 되면 왜 연분홍 벚꽃은 미친년처럼 달 아래서 예뻐질까. 그렇게 어두운 색도 아닌 밤하늘 아래에서 반짝이는 푸딩처럼 부풀어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경계를 넘어가지 못한 밤, 슬픔을 못 이겨 뛰어내린 꽃잎을 잡겠다고 나는 왜 로미오처럼 무릎까지 꿇는 걸까. 내일의 비가 내리면 달빛이 아름다운 꽃잎을 뚫고 흘러내린다고 해도 돌아보면 벚꽃은 미친년처럼 웃고 있겠지. 사랑한다면 벚꽃의 달궈진 화상*에 맞아 죽어도 좋겠지. 그래 사랑한다면 저 벚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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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가을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가을이란 모름지기 뭐든지 떨어져야 제맛이란다.

 

가을엔 여하튼 떨어지게 되어 있다.

 

어깨를 타고 스쳐가는 어떤 전율을 느낄 때 앞서간 내 모든 것들과 밀회를 한다.

 

불모(不毛)의 가슴 속에, 오전이 지나고, 정오도 지나고, 저녁의 그늘 속에 내가 있다.

 

, 참으로, 가을 햇살이 뜨겁네.

   

 

 

환절기

 

  나이는 내가 조금 더 많은 것 같고

 

  한시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를 밀쳐내지는 못하고

 

  갓 지은 밥처럼 수북하게 쌓인 어둠 갓 돋아난 새싹 낯선 등의 체온의 내 몸을 관통한다. 갑자기는 아니고

 

  뜨거운 김이 훅 덮쳐올 때 어떤 방향으로든 계절은 연결된다.

  우리는 지금 계절의 끝과 시작에 서 있다. 발효되지 못한 고백은 주저주저 첫 전화(轉化)를 시작하려 하고

 

  어둠 속에서 오래 있다 보면 모든 게 환해진다. 나이만큼 아는 것이 많은 건 아니고

 

  수북하게 쌓인 어둠은 얇은 잎이 된다. 위안이라면 위안이고

 

  멀리서 계란장수가 득음한 듯 확성기를 틀며 지나간다. 꿈틀꿈틀 모든 게 합쳐지는 환절기

 

  볼이 미어지도록 먹은 밥이 달다. 사랑한 적 없기에 뜨거운 고백도 없고

   

 

 

몽타주

 

누군가의 손에서

타인의 욕망에 부합되는 얼굴을 가지게 될 때

 

수없이 쌓인 주름은

아픈 것을 보고 더 슬퍼할 줄 안다는 증거다

 

4B연필의 뾰족한 끝이 주름을 파고든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지기 전의 표정으로 버려지는

지우개 똥 같은 얼굴의 윤곽들

 

사과를 잘 깨물 것 같은 이는 보이지 않고

사과 씨가 발끝에서 어둠으로 튀어 오른다

 

타인의 긴 호흡에 밀려난 얼굴들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곁에 머물고 싶었을 것이다

 

얼굴은 지워지면서 어느새 주변에서 완성된다

   

 

 

무화과나무

  -1971~1996

 

  쭉 뻗은 몸과 하얗게 분칠한 얼굴은 최초의 언어를 잃었다. 오늘 무화과나무를 순장하고 왔다. 제 몸으로 둥근 무덤을 만드는 무화과의 표정은 언제나 다발성 슬픔이다. 너도나도 죽은 이들 앞에서 어금니를 물며 마지막으로 따뜻했던 입을 쓰다듬어 주었다. 온갖 사후(死後)를 가진 지구는 과거와 현재에서 복잡했지만 이내 간결해진다.



               * 안은주 시집 <오류의 정원> (시인동네 시인선 094)에서

                   * 사진 : 지난 일요일 붉은오름 산행 중 만난 버섯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