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 2018년 가을호(통권 31호)는
‘산림문학의 만난 문인’으로 시인 최상호를 선정하고
그의 시 8편을 실었다.
최상호 시인은
경주시 강동면 출신으로
1996년 <교단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에 ‘그대 가슴에도 감춰진 숲이 있다’,
‘고슴도치 혹은 엔두구 이야기’
‘무의도 연가’ 등이 있다.
여기 산림문학의 초대시를 옮겨
가을색이 짙어가는
봉개 민오름 숲의 나무들과 같이 싣는다.
나무는 주로 일찍 물드는
사람주나무와 산딸나무,
산벚나무, 뽕나무, 개옻나무, 참빗살나무 등이다.
♧ 그대 가슴에도 감춰진 숲이 있다 - 최상호
그대 가슴에
그대가 잊어버린 숲이 있다.
물방개 헤엄치는 정겨운 웅덩이와 오염 안 된
물줄기에 닿은 튼튼한 뿌리의 갈참나무가 서 있는
거기에는
조용히 그러나 건강한 물풀들이 흔들리고
향기를 뿜으며 썩어 가는 도토리로
나무 아래는 그저 태고의 정적뿐.
경외敬畏의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던 팽나무는
여전히 늙은 모습인 채,
가시 넝쿨 아래로 바람이 분다.
휘파람 소리 같은,
빗소리 같은 이름 모를 새들의 웃음과
나무들의 합창을 들으며
이제는 지친 손발을 모으고 쉬어야 할 때다
교목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대의 잠을 깨울 때까지
이제는 누워 안식할 시간.
그대 가슴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숲으로 향할 때다.
♧ 가을 공원에서
아무도 모르게
황금의 언어들을 준비했다가
어느 아침 눈부시게 손 흔들며 다가와
우수수 쏟아버리고
돌아서는
은행나무는
내 첫사랑의 모습입니다
♧ 가을 편지 · 2
어머님.
그날
바람 따라 삐걱삐걱 살 부비며
소리 내는 나뭇가지 사이에
당신은
납작한 조약돌을 힘겹게
끼워 놓으셨지요.
읍내 삼십 리 길
오며 가며
눈여겨 보아두었던 솔가지 위에
개구리 거품 같은
침도 한 번 바르게 하셨지요
지금도
가을입니다. 어머니
손 모아 중얼대던 당신의 어깨 너머
하늘엔
그때처럼
목화송이 몇 개가 하얗게
풀어져 있습니다
인생살이 힘들어
이빨 갈아야 할 일도 더러더러
있지만
그날 당신이 베풀어 준
조약돌 처방의 영험으로
이젠 더 이상 이빨 빠드득 갈지도 않고
입술 꼭 다물고 잠을 자며
순하게
세상 물살
건너고 있습니다
♧ 사랑의 시력
저렇게
가슴 저리도록 반짝이는 별도
과학 속에서도
그저 한 개 가스덩어리일 뿐
가장 푸르고 아름다운 별일수록
가장 뜨겁고 잔인한 핵융합의
덩어리일 뿐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 마라
그냥 그대로
부족한 시력으로 쳐다보아야
가슴 다치지 않는 것
눈 다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 까치집 명상 ․ 5
태풍 몰아치던 날
미루나무 가지 꺾이던 날
그 위의 까치집 까치 가족
작은 손 마주 잡고
흔들릴수록 단단해지는 사랑을
깨우친다
♧ 다산 초당을 찾아
갈대가 허옇게 누운 남해안 마을 지나
아직도 서슬 푸른 대나무 숲속을 지나
잔뼈 드러낸 소나무 뿌리를 밟고 가쁜 숨 몰아쉬며
동암東庵의 지붕 아래 앉으면 스승님, 다산 스승님이
정석丁石 두 글자를 문패 삼아 깊숙이 새기셨고나
땅 끝 조차도 싫어 홀로이 숨은 산 중턱
조선의 햇살 가린 이 어둠 속에서
바닷바람 맞아가며 때로 차 끓이고 때로 눈 까만
동네 아이들 불러 하늘 천 따지 가르쳤으리
목민의 마음을 다듬었으리
흔들림 없는 선비고집 얼음 속 청정한 물줄기로
배우며 우거진 솔가지 너댓개 깔고 소주 한 잔
올린다
♧ 귀향인사
고향에 가면 꼭 인사드리고 오는
점잖은 나무가 있다
경주군 안강읍 옥산리의
옥산서원 발밑의 맑은 폭포도 좋지만
또 회재 선생의 시퍼런 목소리가
아직도 강강하지만
아무래도
그 초입의 들길 저쪽 어귀에 앉은
세 그루의 소나무
아니 세 분의 선비
한 나무는
아주 귀골의 풍채로 먼발치에서부터
설설 기게 만들고
그 옆 옆의 나무는 아,
온 역사를 다 짊어지고도
저리 깨끗할까
어깨와 등허리가 저리도 곱게 늙었을까
그리고 가운데 것은,
나무의 본령이 이러하다는 듯
양쪽의 무게를 이어받아
온동 기상이 펄펄하다
오오,
이름 없는 선비들이
선비 같은 나무들이
무섭게 뿌리내려 지킨 이 땅
고향에 가면
병진년 한여름 뙤약볕의
일등병이 다시 되어
엄숙한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고 온다
♧ 마음 밭의 객토작업
봄을 맞기 전에
내 갈라진 마음 밭에도
새 흙을 좀 부어야겠다.
어린 시절
농부인 아버지는 한 해의 농사를 끝낸 뒤
푸석해진 논밭에 자주
기름진 산자락 흙을 옮겨 덮으셨다.
잃어버린 땅심을 찾아야한다며
발길 안 닿은 새 흙을 퍼 넣으시던
그때의 아버지처럼
나도 내 척박해진 영혼에 퇴비를 해야겠다.
한때는 제법 윤택했던 손
처음에는 웬만큼 너그러웠던 귀와 눈이
회복을 위해
새해에는 검붉은 산자락 흙과 강변 고운 모래로
늙어버린 마음 밭에
객토작업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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