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날 일 - 임보
어느 성현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이 군자’라고 했는데
나는 군자와는 거리가 먼 소인인가 보다
누가 혹 내 글을 읽어주지 않나 하고
매일 페북에 열심히 드나들고 있는 꼴이라니…
그래봐야 백년하청,
세상은 임보를 거들떠도 안 본다
유명해지려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연일 떠들어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이름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시류에 부응해서 나도 ‘괴물’이라도 한번 돼 본다?
나를 찾아오는 젊은 여성은 없으니
길 가는 여성이라도 붙들고 희롱을 한번 해 본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런 해프닝을 벌인다면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찾아와
특종으로 보도하기는커녕
파렴치한으로 즉각 고발되어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고 말 게 뻔하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괴물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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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불허전 :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름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
♧ 빈대떡집에서 - 정순영
불협화음교향악이 울리는
종로5가 광장시장 빈대떡집 노점 긴 나무의자에
무거운 하루를 내려놓고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에
얼큰한
삶
메뚜기첩자를 쓰고 가로수를 옮아가며 까악까악 우짖는
까치의 희번드르르한 맵시를
논두렁 밑에 숨어 개골개골 시새우는
개구리 같은
우리는
♧ 우주의 만소滿笑 - 김영호
무거운 번뇌의 짐을 등에 지고
숲속을 산책하던 중*
깊은 상처에서 고름이 나오는 노목老木,
거룩한 뜻을 기리는 성자를 만났네.
몸은 상했는데 얼굴은 평화를 보였네.
희생과 견인으로 승리한 그 성목聖木앞에
온유와 겸손이 없었던 부덕함을 회개하고
참회하는 긴 기도 중
갑자기 나무눈이 뜨이고 짐이 가벼워졌네.
사방의 나무들이 만소滿笑를 보여 주었네.
산꽃들이 웃고
풀잎들이 미소를 주었네.
비구름이 웃고
산물 산새가 웃었네.
나무눈이 뜨이니
삼라만상이 웃고
우주가 웃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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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Big Gulch(Mukilteo 도서관 뒷동산)
♧ 저물녘, 천리향 아래서 - 김희진
꽃술 떨리는 네 향기 따라
나는 하늘에 닿는다
멀리 떠나 있는 잊힌 이름들이
꽃잎에 실려 후드득 쏟아진다
생살 찢는 향기에
젖지 않아도 될 것들이 모두 젖는다
코끝 아릿한 곳, 천리 밖까지
아득한 저녁의 무게에 못 이겨
어둠이 갈지자로 걸어간다.
♧ 며느리밥풀꽃 - 이종섶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가 잠시 들어온 여자가 말했다
이민 온 사람들은 맏이가 대부분이라고 맏며느리가 부추겨서 이민 온 거라고
한국에 다시 들어가기 싫어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민들레 - 마선숙
집 텃밭에 노오란 민들레 피었다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여리디 여린 꽃잎 하나
땅에 떨어진 게 없다
꽃이 질 때면
꽃받침이 꽃들을 싸안고
씨를 높이 넓은 세상으로 날려 보내고
자식을 땅에 굴리지 않고
연처럼 띄우는 모정
목련 위에
라일락 위에
장미 위에
키 작은 민들레 우뚝 솟았다
♧ 탈수 - 조성례
내 무릎에서 파돗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몽돌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솟구칠 적마다
몽돌의 구르는 소리는 더욱 요란하다
언젠가 찾아간 바닷가
찢긴 바닷물에 씻긴 몽돌들이 자그락자그락
내게 말을 걸어 온 적이 있었다
달려온 바닷물을 짜낼 때마다 내는
내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느냐고
파도에 관절이 부러져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인 것을 당신은 아느냐고
사람들이 관절 부러진 나의 울음을 아느냐고
내 무릎 속에서
파도가 일 적마다
깨어진 연골판 사이를 들락거리는 바닷물
몽돌은 지금 바다를 짜내는 중이다
♧ 불씨 - 김혜천
울음새꽃 이파리 한 잎, 말갛다
새의 날개짓이 공기방울을 떨구는
오카리나 선율의 아침
길길이 날뛰고 으르렁대던 먼 바다를 날아온
난자의 란卵과 난 막膜사이
씨앗 하나 깃든다
갯바위 정수리 주름과 주름 사이로
분사된 괭이갈매기 배설물
우연한 마주침은 또 하나의 주름을 만든다
꽃받침을 제치고 돋아나는 꽃잎
꽃잎 위에 꽃잎을 얹는 꽃잎
물질의 바닥에서 미로를 헤엄쳐
정신의 꼭짓점으로 솟아오른다
원뿔이 넓은 밑면을 가질수록
높아지는 꼭짓점
헌 누더기 벗어던지고
새로 태어난 자여
날아오르라
카오스모스chaosmos의 세계 속으로
* 월간 『우리시詩』 2018년 11월호(통권 365호)에서
* 사진 : 물들기 시작한 튤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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