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시詩' 11월호의 시 - 1

김창집 2018. 11. 6. 22:33


이름날 일 - 임보

 

어느 성현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이 군자라고 했는데

나는 군자와는 거리가 먼 소인인가 보다

누가 혹 내 글을 읽어주지 않나 하고

매일 페북에 열심히 드나들고 있는 꼴이라니

 

그래봐야 백년하청,

세상은 임보를 거들떠도 안 본다

유명해지려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연일 떠들어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이름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시류에 부응해서 나도 괴물이라도 한번 돼 본다?

나를 찾아오는 젊은 여성은 없으니

길 가는 여성이라도 붙들고 희롱을 한번 해 본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런 해프닝을 벌인다면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찾아와

특종으로 보도하기는커녕

파렴치한으로 즉각 고발되어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고 말 게 뻔하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괴물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

* 명불허전 :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름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

     

 

빈대떡집에서 - 정순영

 

불협화음교향악이 울리는

종로5가 광장시장 빈대떡집 노점 긴 나무의자에

무거운 하루를 내려놓고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에

얼큰한

메뚜기첩자를 쓰고 가로수를 옮아가며 까악까악 우짖는

까치의 희번드르르한 맵시를

논두렁 밑에 숨어 개골개골 시새우는

개구리 같은

우리는

   

 

 

우주의 만소滿笑 - 김영호

 

무거운 번뇌의 짐을 등에 지고

숲속을 산책하던 중*

깊은 상처에서 고름이 나오는 노목老木,

거룩한 뜻을 기리는 성자를 만났네.

몸은 상했는데 얼굴은 평화를 보였네.

희생과 견인으로 승리한 그 성목聖木앞에

온유와 겸손이 없었던 부덕함을 회개하고

참회하는 긴 기도 중

갑자기 나무눈이 뜨이고 짐이 가벼워졌네.

사방의 나무들이 만소滿笑를 보여 주었네.

산꽃들이 웃고

풀잎들이 미소를 주었네.

비구름이 웃고

산물 산새가 웃었네.

 

나무눈이 뜨이니

삼라만상이 웃고

우주가 웃었네.

 

---

*시애틀 Big Gulch(Mukilteo 도서관 뒷동산)

   

 

 

저물녘, 천리향 아래서 - 김희진

 

꽃술 떨리는 네 향기 따라

나는 하늘에 닿는다

 

멀리 떠나 있는 잊힌 이름들이

꽃잎에 실려 후드득 쏟아진다

 

생살 찢는 향기에

젖지 않아도 될 것들이 모두 젖는다

 

코끝 아릿한 곳, 천리 밖까지

아득한 저녁의 무게에 못 이겨

어둠이 갈지자로 걸어간다.

     

 

며느리밥풀꽃 - 이종섶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가 잠시 들어온 여자가 말했다

이민 온 사람들은 맏이가 대부분이라고 맏며느리가 부추겨서 이민 온 거라고

한국에 다시 들어가기 싫어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들레 - 마선숙

 

집 텃밭에 노오란 민들레 피었다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여리디 여린 꽃잎 하나

땅에 떨어진 게 없다

 

꽃이 질 때면

꽃받침이 꽃들을 싸안고

씨를 높이 넓은 세상으로 날려 보내고

 

자식을 땅에 굴리지 않고

연처럼 띄우는 모정

 

목련 위에

라일락 위에

장미 위에

키 작은 민들레 우뚝 솟았다

 

 

 

탈수 - 조성례

 

내 무릎에서 파돗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몽돌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솟구칠 적마다

몽돌의 구르는 소리는 더욱 요란하다

 

언젠가 찾아간 바닷가

찢긴 바닷물에 씻긴 몽돌들이 자그락자그락

내게 말을 걸어 온 적이 있었다

달려온 바닷물을 짜낼 때마다 내는

내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느냐고

파도에 관절이 부러져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인 것을 당신은 아느냐고

사람들이 관절 부러진 나의 울음을 아느냐고

 

내 무릎 속에서

파도가 일 적마다

깨어진 연골판 사이를 들락거리는 바닷물

몽돌은 지금 바다를 짜내는 중이다

 

 

 

불씨 - 김혜천

 

울음새꽃 이파리 한 잎, 말갛다

 

새의 날개짓이 공기방울을 떨구는

오카리나 선율의 아침

 

길길이 날뛰고 으르렁대던 먼 바다를 날아온

난자의 란과 난 막사이

씨앗 하나 깃든다

 

갯바위 정수리 주름과 주름 사이로

분사된 괭이갈매기 배설물

우연한 마주침은 또 하나의 주름을 만든다

 

꽃받침을 제치고 돋아나는 꽃잎

꽃잎 위에 꽃잎을 얹는 꽃잎

 

물질의 바닥에서 미로를 헤엄쳐

정신의 꼭짓점으로 솟아오른다

 

원뿔이 넓은 밑면을 가질수록

높아지는 꼭짓점

 

헌 누더기 벗어던지고

새로 태어난 자여

날아오르라

카오스모스chaosmos의 세계 속으로

 

 

                 * 월간 우리시201811월호(통권 365)에서

                               * 사진 : 물들기 시작한 튤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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